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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리노

“아, 겨울 냄새”

 

겨울 냄새. 이건 분명히 겨울이 찾아왔다는 신호다.

 

항상 겨울 냄새를 맡을 때면, 추운 겨울날이어도 마음 한구석까지 포근해지는 기분이다. 아무리 한글이라는 문자로 모든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정말이지 이 겨울 냄새를 표현할 방법은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다들 겨울 냄새라 하면 떠오르는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떠오르는 기억뿐만 아니라, 그때 느꼈던 감정이던지, 그때 만났던 사람이던지.

 

겨울 냄새는 아까 말했던 것처럼, 겨울이 찾아왔다고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지금도 계속해서 조금씩 계절이 변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계절이 완전히 지나고, 새로운 계절이 돌아와야만 우리는 지나간 계절을 떠올리고 또다시 새로운 계절을 느끼곤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사랑에 빠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미 사랑에 빠져버린 후에야 내가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계절은 놓쳐도 매번 비슷한 시기에 다시 돌아오지만, 사랑은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온다고 해도, 그 돌아온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해 다시 그 사랑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한 것 같다.

 

만약 나도 그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다면, 우리 사이가 조금은 변하지 않았을까...

 

내가 동해를 처음 만난 건 하얀 첫눈이 내리던 날, 눈이 와서 날씨는 조금 포근했지만, 마음은 차디찬 얼음 같았던 날. 부모님의 직업상, 열 손가락으로 세기 힘들 정도로 자주 다녔던 이사에 더는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는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절대 친구들한테 정 주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한 채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이사를 하던 중이여도, 나는 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에 나 혼자 새로운 학교로 등교를 하게 되었다. 평소에 자주 가던 곳이라면 눈 감고도 찾아갈 정도로 길을 잘 찾았지만, 언제나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그 탓에 30분이나 일찍 등교했으나 자칫 하다가는 첫날부터 지각하게 생겼다.

 

새벽부터 이사 준비를 하느라 밖에 오래 있었더니 몸이 이미 차가워진 상태였는데, 괜히 첫날이라고 추워서 잘 입지도 않던 코트를 입었더니 손과 귀는 얼 것 같았고 머리 위로는 눈이 내려서 몸이 조금씩 떨려왔다. 다행히 주변에 나와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 아이들을 찾아가 학교를 찾을 수 있었다.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아무리 찾아도 이 학교에 교무실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하필 주변에 지나가는 선생님들이 없어서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진짜 이러다가는 첫날부터 지각하는 학생으로 찍히게 생겼다. 마침, 내 옆으로 한 남자애가 지나가길래 나도 모르게 팔을 붙잡았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을 걸어본 적은 없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 근데 무슨 팔이 이렇게 딱딱해...?

 

순간 머릿속으로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남자애가 뒤를 돌아보는데 무슨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얼굴에 태평양처럼 넓은 어깨... 전학을 다니며 많은 아이들을 만나본 결과, 이런 아이들은 모범생 아니면 양아치였다. 나는 충격을 받은 채 잠시 멍하니 얼굴만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볼에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손길에 아차 하며 그 남자애의 눈을 쳐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소를 지었지만, 많이 당황한 것을 숨기려는 것이 티가 났다.

 

“무슨 일이야?”

 

“음... 교무실이 어디예요...?”

 

아,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끌었다. 시계를 보니 내가 가야 할 시간이 다 되어 갔다. 나는 급하게 그 남자아이에게 교무실이 어디냐고 묻자, 자기가 데려다주겠다며 얼른 따라오라고 했다. 본인도 빨리 교실에 들어가야 하는 시간일 텐데, 그 시간에도 남을 도와주는 것을 보니 나쁜 아이는 아닌 것 같다. 얼굴도 잘생긴 게...

 

‘얼굴도 잘생긴 게 성격도 좋네.’

 

“응?”

 

속으로만 생각하려던 걸 모르고 내뱉어버렸다. 초면에 쪽팔려 죽을 것 같다. 다행인 것은 원래도 목소리가 작아서 제대로 못 들은 것 같다.

 

“얼굴도 잘생긴 게 성격도 좋다고?”

 

“아... 아니야!”

 

“전학 왔나 보네, 여기가 교무실이야.”

 

“으응... 고마워!”

 

“옷 따뜻하게 입고 다녀, 눈 오는데 추워 보인다.”

 

그 아이 덕분에 교무실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지금 내가 간절히 비는 것은 담임선생님을 잘 만나는 것도 있지만, 아까 그 아이와 같은 반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아까 내가 한 말을 다 들은 것 같다. 씨익 웃으며 되물은 것이 누가 봐도 다 알고 그러는 것이었다. 심지어 내가 아니라고 부정했을 때, 순간 부끄러워서 그런지 나의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는데... 아마 그것도 다 본 것 같다.

 

그래도 다행인 건 담임선생님이 생각했던 것보다 친절하셔서 다행이었다. 이제 반 아이들만 잘 만나면 완벽한 학교생활이 될 것이다. 아무리 전학을 많이 다녀도 선생님과 새 교실로 들어가는 길은 항상 설레는 것 같다.

 

“자, 얘들아 새로운 친구가 전학을 왔어. 혁재야, 인사할까?”

 

“안녕 나는 혁재...”

 

망했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눈빛을 따라가 보니, 저 맨 끝에 너무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저 얼굴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얼굴이긴 하지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는데. 아까 상황이 다시 머릿속에서 회상이 되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선생님! 여기 자리 비었어요! 혁재 여기 앉혀요!”

 

“이동해, 혁재 괴롭히지나 말고 잘해줘, 적응 잘하게.”

 

진짜... 아는 얼굴 있으면 첫날부터 피곤한데. 대충 분위기만 봐도 옆에 있으면 정말 피곤할 스타일이다. 이번에는 반 아이들이랑 말도 최대한 안 할 생각이었는데, 누구 때문에 다 틀린 것 같다. 말만 안 걸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채 그 아이 옆으로 가서 앉았다. 제발 말 걸지 마라. 걸지 마.

 

“너 좀 귀엽다! 난 이동해야 나 알지?”

 

“어.”

 

“말이 없는 스타일이구나! 맘에 든다 너!”

 

대충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나서 웃으며 반을 나가는데 옆에 있는 친구들도 심상치가 않다. 어느 학교에나 있는 문신 가득한 애들이나, 누가 봐도 양아치같이 생긴 아이들이 저 아이 뒤를 쫓아가는 게, 그냥 무시하고 사는 게 편할 것 같다.

 

그리고 같은 반 아이들도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이동해인가 뭔가가 나가자마자 반 몇몇 아이들이 조금씩 내 옆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아, 이번 학교는 조용히 넘어가기는글렀다.

 

“야... 너 이동해랑 아는 사이야?”

 

“아니.”

 

“그래? 쟤 원래 선생님들이랑은 잘 얘기하는데 애들한테는 눈길도 안 주거든. 이동해 친구들 빼고는 말해본 애 별로 없을걸. 사실 이동해 친구들조차도 말해본 애 몇 없어.”

 

“...이동해라는 애 양아치야?”

 

“아니. 양아치는 아닌데 그냥 좀 그런 애들이 쫓아다니긴 해. 솔직히 잘생겼잖아.”

 

그래. 잘생겼지. 그래서 더 짜증 난다. 이동해 쟤는 학교에 말해본 애도 별로 없다는데 하필 첫날부터 굳이 나한테 말을 거는 거야. 진짜 피곤하게. 앞으로는 제발 안 엮였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동해는 날이 갈수록 더 달라붙는 것 같다. 왜 그러는 걸까...

 

“혁재야, 나랑 밥 먹으러 가자.”

 

“나 밥 안 좋아해.”

 

“혁재야, 카페 갈래?”

 

“카페인이 몸에 안 맞아.”

 

“그럼 혁재 집 놀러 갈래.”

 

“나 집 없어.”

 

다른 애들이 불쌍하게 쳐다볼 정도로 철벽을 쳐도, 이걸 즐기는지 아니면 더 놀리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이동해는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한번 놀아주고 나면 좀 나아지겠지 싶은 마음으로 학교가 일찍 끝나는 날에 카페에 가주기로 했다. 거기서 정말 단호하게 하지 말라고 말해야겠다.

 

“혁재 뭐 마실래? 카페인은 안 맞는다며.”

 

“아무거나.”

 

한 손에는 아메리카노, 다른 손에는 바닐라 라떼를 들고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이 카페는 왜인지 모르겠는데 주변에 커플들밖에 없다. 가뜩이나 추운데 더 외롭게 한다. 달달한걸 먹으면 기분이라도 좋아질까 싶어, 바닐라 라뗴를 한번 들이켰다. 라떼인데 생각보다 조금 썼다. 커피 맛도 느껴졌다.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혁재야, 기분이 안 좋아? 어? 머리에 뭐 묻었네?”

 

갑자기 얼굴을 내 눈앞에 들이밀더니, 꽤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바라봤다. 잠시 내 머리를 살짝 만지곤, 아 아니었네 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카페인이 들어가서 그런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역시 카페인이 들어간 건 나한테 안 맞는 것 같다. 그냥 아까 딸기라떼 마신다고 할걸.

 

“혁재야, 왜 얼굴이 빨개져? 왜, 내 얼굴 보고 반한 거야?”

 

“시끄러. 나 집 갈 거야.”

 

“집 없다며 혁재야.”

 

그때 이후로, 우리 관계에는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아 조금의 변화는 생겼다. 나는 이동해 얼굴만 보면 자꾸 그때의 가까웠던 얼굴이 생각났다. 그래서 예전보다 더더욱 이동해를 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전학을 갈 때까지, 이동해는 끝도 없이 나에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나는 끝도 없이 이동해를 밀어냈다. 이제는 반 아이들이 이동해가 좀 불쌍했는지 내 옆으로 와서는 ‘너 되게 좋아하나 봐, 좀 잘해주라!’라며 나를 부추겼지만, 말 같지도 않은 말들이다. 모두 무시했다.

 

“혁재는 이제 전학 안 갈 거지?”

“알아서 뭐 하게.”

“따라갈 거야.”

 

“안 알려주면?”

“우리 운명처럼 만났잖아, 운명이니까 어떻게든 만나겠지.”

운명 같은 소리 좋아하네. 이 세상에 운명이 어딨어, 그냥 운명이라고 포장된 우연일 뿐이지.

 

“혁재야, 눈 온다! 첫눈이야!”

 

“알아. 근데 나 전학 올 때 첫눈 왔잖아.”

“그건 작년 첫눈이고, 이건 올해지! 와, 우리 그럼 첫눈을 두 번이나 같이 맞은 거네?”

 

“그래, 좋네...”

 

두 번째 첫눈을 맞은 바로 다음 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이동해와의 학교생활도 끝이 났다. 왜냐하면, 나는 또 전학을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항상 그렇듯이. 이번에도 전학 가기 전날조차 아무에게도 나의 전학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매번 가는 전학인데 뭐.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아무에게도 나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 알려주면 정말 귀찮아진다. 특히 이동해 같은 애들은 나를 귀찮게 할 게 뻔하다.

 

새로운 동네는 그냥 다른 동네와 다를 바 없이 비슷했다. 그냥 새로운 동네 풍경이 오히려 익숙해져 버렸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 한번 전학을 가게 되었다.

 

“아, 겨울 냄새”

 

겨울 냄새를 맡으니,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까지 포근해지는 기분이다. 그러다 갑자기 작년 이맘때쯤 첫눈이 내리던 날이 생각이 났다. 그러다 보니 그때 처음 만났던 사람도 생각이 나버렸다.

 

이동해.

 

왜 하필 지금 걔 생각이 나는 걸까. 괜히 마음만 착잡해졌다. 기분전환이나 할까 싶어, 집 주변 카페에 들렀다. 왠지 모르게 지금은 바닐라 라떼가 먹고 싶다. 요즘은 바닐라 라떼를 먹게 되더라도 꼭 샷은 반 샷으로 먹었지만, 오늘은 그냥 예전에 먹었던 것처럼 시키고 싶어졌다.

 

한입 마셔보니, 그때 이동해와 같이 마셨던 그 커피 맛이 났다. 이상하게 계속 마셔도 그때처럼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았다. 그냥 조금 쓴 맛만 더해졌을 뿐, 그때처럼 두근거리지는 않았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기분전환 하러 온 카페에서 마음만 더 복잡해졌다. 복잡해진 마음에, 창밖을 바라보니 첫눈이 내리는 날이라 그런지 내 또래 아이들이 나와 놀고 있었다. 얼마나 재밌게 노는지 노는 소리가 카페 안까지 다 들어왔다. 저렇게 재밌게 노는 아이들을 보니 더 외로워졌다.

 

‘...이동해 보고 싶다.’

 

무의식적으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동해...?

 

아... 그랬구나. 이제야 내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 카페에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빨개진 것은 바닐라 라떼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일부로 이동해를 피한 것도, 괜히 이동해한테 더 차갑게 군 것도. 모두 내 마음의 변화 때문이었다. 내가 아무리 밀어내도 밀어낸 만큼 더 다가와 줬던 그 아이를. 이동해를 나도 모르게 좋아했다.

 

‘만약 내가 그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다면, 우리 관계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니다. 변할 리가 없지. 운명은 무슨, 두 번이나 전학 가는 사이에 찾아오지도 못했으면서.

 

반 정도 남은 라떼를 아무렇게나 버리고는 밖으로 나왔다. 우산도 안 가져왔는데, 옷도 집에 입고 있던 대로 나와서 조금 추웠다. 밖은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대충 옷에 달린 모자를 쓰고 집으로 달려가려던 차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의 팔을 붙잡았다. 급한 일이 있어서 가보겠다 하고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려 했지만, 이 사람 손 악력이 장난 아니다. 순간 머릿속으로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이세요...?”

 

“음... 혁재 집은 어디에요?”

 

“네...?”

 

“옷 따뜻하게 입고 다녀, 눈 오는데 추워 보인다.”

 

‘...이동해?’

 

“아, 우리 그럼 첫눈을 세 번이나 같이 맞은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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