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이의 온도에도 기후변화가 찾아왔나봐.
림들
20XX년 6월 17일 금요일, 온도 : 29°C
"심각한 지구온난화로 인해 사계절이 뚜렷하던 우리나라에도 기후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이번 달의 최고 온도는..."
"언제부터 그렇게 사계절이 뚜렷했다고.. 봄 가을은 짧기만 하고 여름이랑 겨울은 더럽게 길던데."
혁재는 열기를 담은 한숨을 푹 내쉬며 투덜댔다.
"그러니까, 진짜 밖에 나가는 것도 힘들어."
온도가 높은 것에 짜증을 내던 동해도 거기에 한 마디를 얹었다.
사실이었다. 최근 들어 계속해서 기후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초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날씨는 밖에 가만히만 있어도 땀을 뚝뚝 흘릴 정도로 더웠다.
밖에서는 매미들과 개구리들이 울었다.
TV에서는 여름용품들의 광고가 계속해서 나왔다.
폰에서는 안전재난문자로 폭염 주의보와 폭염 경보가 계속해서 왔다.
"야, 선풍기 좀 세게 틀어봐아..."
"제일 세게 튼거야, 네가 내 옆으로 가까이 오던지."
"붙어있으면 덥잖아.. 이럴거면 차라리 부채를 꺼내오겠다."
"에어컨은 왜 하필 이럴 때만 고장나서.."
하교를 한 후, 혁재는 학교 친구인 동해의 자취방에 놀러가 놀았다.
물론 공부는 그다지 하지 않던 둘이었기에, 서로의 집에 놀러갈 때가 많았다.
.."이번에 사회었나, 기후변화 과제 있지 않았어?"
"아, 그거 하기 귀찮은데.."
"혁재야, 같이 하자. 같이 자료 찾다보면 빨리 끝나겠지."
"에휴,...지금 빨리 끝내지 뭐."
수업 시간에 졸다 얼핏 들었던 단어였다.
기후변화(氣候變化), 범지구적, 세계적 규모의 기후 시스템 또는 지역적 기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최소 수십 년 이상 동안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위키백과).
몇 년동안 언론에서 계속해서 떠들어대던 주제 중 하나였다.
처음엔 그게 무슨 대수라고, 당장 덥지도 않은데, 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해가 가면 갈수록, 온도는 높아졌고, 기후는 달라져만 갔다.
이제는 바깥 뿐만 아니라 집 안까지 후덥지근해졌다.
"그러니까 내 방에 들어가서 하자, 응?"
"싫어, 선풍기 옮기기도 귀찮은데 무슨. 노트북이나 꺼내와."
"방이 더 시원할 걸, 햇빛 안 들어서."
"..그러면 선풍기는 네가 옮기던가."
그렇게 우리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 키보드가 타닥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떠드는 소리도 가끔 들렸다.
뉴스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거실에서 혼자 떠들어댔다.
"..또한, 기후가 변함으로 인해 사람들의 심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더워지는 날씨에 지인과의 만남이 적어져 대인관계가 나빠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과학자들은.."
하지만 그 소리는 곧 방 안에서 떠드는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
"끝났다~"
"야, 이동해, 조금만 기다려 봐 나 이것만 하면 끝나."
"알겠어 알겠어, 음료수 가져올게."
"..."
동해가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다시 쾅 닫히는 소리가 났다.
"하.."
혁재는 발열되어 뜨거워진 프린터기 위에 발을 살짝 올렸다.
다행히 크게 뜨겁지는 않았다.
'..쟤는 내가 티도 안 내는데 계속 다가온단 말이지.'
동해는 혁재에게,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오랜 짝사랑 상대이기도 했다.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혁재는 동해에게 최대한 틱틱거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동해의 원래 성격 때문일까, 아니면 기분 탓일까.
혁재는 동해가 자신에게 전보다 더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모르겠다, 이거나 마저 해야지."
"아직도 다 못 했어?"
"야, 조용히 해라."
"좀 도와줘?"
"알아서 할게, 음료수 뭐 가지고 왔어?"
다정하게 은근슬쩍 자기 일에 개입하는 동해를 막기 위해 혁재는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동해가 가져온 쟁반 위에 놓여있는 두 개의 잔을 봤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야, 네가 좋아하는 음료수가 뭐 한 두 개야?"
"..뭐 있는데."
혁재는 동해와 같이 밖으로 나가 냉장고를 살펴봤다.
탄산 음료 여러 캔, 달달한 과일 주스 여러 병이 있었다.
왠지 음료수가 끌리지 않았다.
"난 그냥 물 마실게."
"응? 여기 네가 좋아하는 딸기 음료수도 사놨는데?"
"..됐어. 언제부터 그렇게 챙겨줬다고."
쓸데없이 친절하다니까, 하고 혁재는 생각했다.
자신을 챙겨준다는 생각에 얼굴이 약간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야, 얼음 없어?"
혁재는 조금이라도 빨리, 얼굴이 빨개지는 걸 막기 위해,
최대한 차가운 물을 만드려 애를 썼다.
하지만 이미 빨개진 귀와 얼굴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동해는 그걸 알고 있었다.
-
20XX년 7월 5일 화요일, 온도 : 33°C
"아 심심해.."
"게임이나 할래, 혁재야?"
"네 게임 다 재미없어."
기말고사가 끝난 무더운 어느 여름날, 혁재는 다시 동해의 집에 놀러갔다.
시험이 끝났기 때문도 있지만, 여느 날과 다름 없는 루틴이었기에, 그랬다.
다만 조금 달라진 것은,
동해도 혁재에게 왠지 모를 온도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야, 이번엔 너 없으면 못 해."
"무슨 게임이길래..."
"이거, 커플 게임이거든."
그 말에 혁재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커플.
그리고 동해는 게임을 설명하면서 혁재를 찬찬히 관찰했다.
'커플'이라는 단어에 왠지 낯간지러워지는 듯 고개를 살짝 돌리는 모습을 보고,
동해는 자신의 머리가 조금 뜨거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던전을 탈출하는 거야.."
혁재의 반응을 본 자신의 반응을 느낀 동해는 말 끝을 살짝 얼버무렸다.
그런 점은 평소에 말 끝을 흐리는 혁재와 많이 닮아있었다.
자신이 혁재와 닮은 점을 찾으면 찾을 수록, 동해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방이 몇 분 동안 조용했다.
게임은 로딩 중이었다.
이런 날에는 쓸데없이 와이파이가 잘 안 터져, 하고 동해는 속으로 탄식했다.
조금 긴 침묵 속에, 동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혁재야."
"왜, 이동해."
"..너 되게.. 토끼 닮았어."
"..?"
혁재는 조금 놀란 얼굴로 동해를 쳐다봤다.
당연했다, 동해는 평소에 이런 말을 잘 안 했기 때문에.
혁재가 낯설게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 그게,"
게임을 시작한다는 뜻의 경쾌한 효과음이 들려왔다.
그 덕분에 동해가 변명할 타이밍이 끊겼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혁재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동해가 가져온 게임은 단순했다.
물 캐릭터와 불 캐릭터가 서로의 웅덩이를 피하면서 문으로 들어가는 게임이었다.
혁재는 항상 이런 탈출 게임만 가지고 오는 동해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니까.'라는 생각으로 항상 같이 해줬다.
뭐, 우정만 있었을까 싶지만.
"네가 이 키 세 개 쓰면 되고, 내가 불 한다?"
"알겠어, 이동해. 네 맘대로 다 해."
"고마워, 혁재야."
"뭐래, 빨리 시작하기나 해."
그렇게 대답한 혁재의 귀는 이미 빨개져있었다.
자기가 불 캐릭터도 아니면서.
선풍기를 쐬고 있었으면서.
방이 그리 덥지도 않았는데도.
동해를 향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나보다, 하고 혁재는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동해의 심장의 온도도,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
"이동해 거기 들어가면 안 돼!!"
"어, 잠깐ㅁ,"
"하..또 죽었네."
"미안, 내가 게임을 잘 안 하다 보니까."
게임도 잘 못하는 동해가 게임을 가져온 이유는 단순했다.
혁재와 공감대를 좀 쌓기 위해.
둘은 친구였지만 서로 조금 달랐다.
아직 같은 점이 많지 않은 것 아닐까?
아니, 많이 달랐다.
성격부터 취미, 좋아하는 것 같은 흔한 공감대가,
이 둘에게는 많이 없었다.
자주 티격태격대는 이유도 이거였다.
가끔씩 서로에게 진심으로 열이 오를 때도 있었지만,
이젠 서로 그러려니 한다.
"야아, 이거 말고 다른거 하자고."
"이거 아니면 뭐해? 재밌는거라도 있어?"
"당연하지, 일단 이것부터 꺼봐."
혁재는 평소에 자신이 하는 게임 사이트를 들어갔다.
하지만 손이 멈추고 말았다.
둘이서, 같이 할 게임이 없었다.
이왕이면 같이 협동하는 걸 하고 싶은데.
"..뭐야, 너도 할 거 없잖아~"
동해가 혁재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 혁재는 심장이 약간 빨리 뛰는 걸 느꼈다.
"..너랑 같이 할 게임이 없는거야."
"뭐야, 나 배려해주는 거야?"
눈치는 더럽게 빨라서, 라고 혁재는 생각했다.
"그래, 이 멍충아. 맨날 재미없는 게임만 들고 오고."
"그럼 우리 보드게임 할래?"
동해는 보드게임 하나를 들고 왔다.
"나 이거 룰 모르는데."
"내가 알려줄게, 일단 주사위 던져봐."
동해가 보드게임 판과 같이 들어있는 상자에서 작은 주사위 두 개를 꺼내 혁재에게 건냈다.
주사위를 건내주며 혁재에게 동해의 손이 겹쳐졌다.
방이 마침 선풍기를 꺼서 후덥지근했기 때문에, 동해의 뜨거워진 손을 혁재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이거 어떻게 한다고?"
-
20XX년 7월 24일 수요일, 온도 : 37°C
여름이 이어지면서, 뜨거움은 극에 달했다.
물론, 혁재와 동해 사이의 온도도 '뜨겁다'는 표현이 어울린 정도로 올라갔다.
친해진 것도 그렇고, 또 다른 감정도 그렇고.
그리고 동해는, 자신의 심장이 혁재에게 느끼는 온도가 몇 도인지 알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야, 이번 여름엔 더워서 장마도 안 온다는데."
"습한 것보단 그냥 더운게 낫지 않을까?"
"..그런가."
너무나도 무더운 여름날에,
혁재는 어쩔 수 없이 동해네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저번 주에 방학식을 하고 사이좋게 하굣길에 헤어진 둘이었지만,
혁재는 이끌리듯 다시 동해네 집으로 가서 놀았다.
"야, 이동해. 오늘은 뭐 하고 놀거야아?"
"우리 둘끼리 할 게임이 뭐가 있겠어."
"..또 그 게임이야?"
"어.. 맘에 안 들어?"
"아니, 그, 음.. 다른 게임 한 번 찾아보지 뭐."
"..그래."
동해는 머쓱하다는 듯이 뜨거운 뒷목을 오른손으로 감싸며 헛웃음을 지었다.
혁재도 약간 미안하다는 듯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썼다.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잠시 흘렀다.
혁재는 분위기를 깨기 위해 에어컨 쪽으로 다가갔다.
"야, 덥다. 에어컨 켠다."
"어어, 20도로 해놔."
"..."
..둘 사이가 뜨거워졌다는 말은,
잠깐 취소해야겠다.
-
그렇게 어색한 시간이 지나고,
여느 친구가 그렇듯 다시 원래대로의 온도와 습도로 돌아왔다.
둘은 거실에서 TV 예능을 틀어놓고 낄낄댔다.
이따금씩 TV에서 나오는 주제에 대해 토론을 열기도 했다.
"야, 저게 말이 되겠냐? 이동해 이상한 거에 승부욕 있다니까."
"혁재야, 이건 진짜 맞다니까. 내가 딴 데에서 봤어."
"어디, 어디에서 봤냐구-"
"몰라, 기억 안나. 책에서 봤다니까!"
"..야, 우리 너무 유치하게 싸우는 거 아니냐?"
"우리가 그렇지 뭐."
앞에는 널부러진 과자 봉지와 음료수팩, 그리고 둘이 신나게, 시끄럽게 놀던 흔적이 있었다.
음악을 틀기 위해 켜놓은 블루투스 스피커, 춤을 추기 위해 잠시 옆으로 밀어놓은 러그.
TV 예능에서 나온 실험을 따라하기 위해 꺼낸 읽어보지도 않은 책, 둘이 물난리를 쳐놓고 수습하기 위해 꺼낸 아직 마르지 않은 수건.
이 모든 흔적에는 둘은 모르는 둘 만의 온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야, 이거 정리해야되는거 아냐..?"
"수건 아직 안 말랐는데, 조금만 있다가 하자."
"이동해 진짜 천하태평하구나.."
"너도 만만하지 않거든,"
"뭐어?"
-
정신없이 놀다보니, 어느새 밖이 어둑어둑해졌다.
그나마 밤에는 햇볕이 사라져 온도가 낮았다.
뭐, 그래봤자 2, 3도 낮은 거지만.
그래도 동해와 혁재 사이의 온도는 똑같았다.
아니, 오히려 더 높아졌다 해야할까.
둘은 TV를 꺼두고 조곤조곤하게 얘기했다.
오늘은 혁재가 동해의 집에서 자기로 한 날이었다.
혹시 몰라 부모님께 문자도 드렸다.
불을 끄고,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누웠다.
눈이 서서히 감기려고 할 때 쯤,
밖에서 우는 풀벌레 소리가 점점 옅어질 때 쯤,
동해가 말을 걸었다.
"..야, 근데 너희 부모님은 우리집에 너 오는거 뭐라 안하셔?"
"맞벌이시기도 하고.. 나한테 크게 관심은 안 주셔서.."
"..그렇구나."
"근데, 갑자기 그건 왜..?"
혁재가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대답한 후,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동해가 마른 입 안을 햝으며 뜸을 들였다.
혁재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베개에 막혀 머리를 비비적대는 것처럼 보였다.
혁재는 얘가 왜 이러지, 더위 먹었나. 싶었다.
동해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
"아니, 방학 동안 계속 우리 집에 오나 해서.."
"혹시 불편해..?"
"아,아니. 그게 아니라,"
그렇게 당황한 얼굴로 대답하던 동해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동해 본인도 그걸 느꼈기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열을 식히고 있었다.
혁재는 동해의 얼굴이 향한 방향으로 자세를 낮췄다.
동해의 표정을 보려 애쓰던 혁재는,
멈칫했다.
그 순간에 산들산들 불던 밤바람이 잠깐 멈추고,
마침 밖에서 울던 풀벌레들이 우는 걸 잠시 멈춘 찰나였다.
잠시동안 세상이 멈춘 듯 했다.
그리고 잠이 들 듯, 말 듯하던 혁재는,
동해가 한참 뜸을 들이던 말을 들었다.
"좋아서.."
둘 사이의 온도는, 애(愛)의 온도였다.
그걸 서로 알아낸 순간 둘 사이에는,
기후 변화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