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열역학
앵유
물체의 상태를 결정하는 데엔 몇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분자 구조, 분자와 분자 사이의 작용, 외부의 압력 등.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의 수많은 별개의 요소들이 합치고 나서야 한 가지 상태가 결정되고 그 안에서 각기 다른 요소들은 변화를 거듭한다.
그중 대표적이고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온도였다. 한 상태를 변화시키는 데에 가장 흔히 쓰이는 수단이었고, 다루기 쉬운 것이었고, 결과가 명확하게 나오는 것이었다. 철에 열을 가하면 녹고, 플라스틱도 열을 가하면 녹았다. 어느 정도 열을 가하면 되는가의 문제였다. 그래, 어느 정도의 열로 얼마나 달구는가의 문제였다.
모든 물체는 비열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비열은 한 물질의 온도를 1℃ 높이는 데에 필요한 열량이다. 비열이 높을수록 온도를 1℃ 높이는 데에 필요한 열(에너지)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똑같은 열을 가했는데 하나는 온도가 오르고, 하나는 그대로인 경우는 비열의 문제인 거다. 온도가 오르는 쪽은 비열이 작고, 온도가 그대로인 쪽은 비열이 높아서였다. 열을 받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태가 나는데에 필요한 양이 많은 거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가끔 간과한다.
사람들은 온도에 많은 것을 비유하곤 한다. 끌어안고 있을 때 전해지는 사랑을 체온에 비유하는 것은 물론, 기부하는 사람들의 마음씨도 온도로 환산한다. 그러나 온도로 비유하면서 사람들 사이의 비열 차이는 고려하지 않는 오류는 흔히 발생한다. 내 두 지인의 이야기를 해주겠다.
내 오랜 지인인 D와 H는 연인 사이다. 대학생일 때 처음 만나 친구로 지낸 지 3년 만에 연애를 시작해 올해로 햇수로만 10년째 연애 중인 장수 커플이다. D는 남자가 봐도 잘생겼다고 인정할 외모와 몸에 배어있는 친절함과 다정함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는데, 그 인기는 과장을 더 해 발렌타인에 초콜릿을 받느라 수업에 못 들어올 정도였다. 그에 반해 H는 순수하고 맑은 얼굴에, 막내인 태가 여실히 드러나는 사람으로 인기가 많다기보단 주변 사람들이 끊이질 않고 여기저기에서 챙김을 받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챙겨주는 사람과 누구에게나 챙김을 받는 사람의 조합은 꽤나 일방적인데, 어른과 아이를 상상하거나 주변에 덜렁이는 친구와 그를 전담 마크하는 친구를 떠올리면 유독 한 곳으로 손이 향하는 게 보일 거다. 우리는 H를 챙기는 D를 볼 때마다 H의 아빠냐며 물었는데, D는 그럴 때마다 잘 뻗은 입꼬리를 휘었다. 그저 웃어넘기던 D는 그 뒤로 딱 2년 뒤에 H에게 고백해서 노력의 대가를 얻어냈다.
둘의 연애는 상당히 일방적으로 보였다. D는 처음 보는 사람이 있더라도 곧잘 자신을 표현하되 선을 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감추기보단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직관적인 사람이었는데 그게 연애에서도 버젓이 나타났다. 타인이 있던 말던 H에게 제 사랑을 말하느라 바빴고, 본격적으로 연애를 하기 시작한 뒤의 D의 하루는 H로 시작해서 H로 끝났다. 재미 삼아 친구들끼리 D가 H에게 하루 동안 보내는 애정표현을 센 적이 있는데, 세 시간 만에 세는 것을 포기했다. H는 그런 성향을 뒤집은 사람인 것처럼 표현이 적었다. 초면인 사람 앞에서는 입을 꾹 다물거나 정말 필요한 말만 했고, 정말 친한 사람의 앞에서나 장난을 치고, 자신의 이야기는 속으로 썩여두는 편이었다. 그게 아무리 사랑이래도 남들의 앞에서 좀처럼 드러내는 편도 아니었을뿐더러 H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모질어지는 낯가리는 장난꾸러기였다. 그래서인지 H는 종종 D를 멍청이, 바보라고 불렀다.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애칭과는 거리가 좀 있긴 하다. 인터넷에나 떠도는 '열렬히 사랑하라!'라던가, '뜨거운 사랑'을 두고 둘이 해당하는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D는 그런 것 같다는 답변이 나올 테고 H는 그러진 않은 것 같다는 답변이 나올 터였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사랑의 비열'인걸 잊지 말아줬으면 한다. 앞서 말했듯이 D와 H는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 D와 달리 H의 표현이 적다고 했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 건 아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과 그러한 것은 다르다.
D는 온종일 사랑을 표현하고 그 방법은 꽤나 로맨틱하다. D는 H가 사랑스러울 때-본인이 그렇게 말하곤 했다- 사슴같이 투명하고 큰 눈을 더 크고 초롱초롱하게 뜨고 한참을 H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 H가 자신을 바라보면 붓으로 그은 듯한 유려한 입술을 활시위처럼 당겨 얼굴을 마주함에 기쁨을 전한다-다시 말하지만, D는 정말 미남이다.-. 그러곤 한참 일을 하고 있던 H의 어깨에 머리를 부비거나 고개를 숙여 펜을 꼭 쥔 손에 키스하곤 한다. 이런 일이 같은 공간에 누가 있던 하루에 수십 번은 나타난다.
이런 D의 사랑을 물이 끓는 점인 100℃로 가정하자. D는 남이 보기에도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루의 데이트로 1000의 에너지를 얻는다고 가정하면, D는 5℃만큼 사랑이 타올랐다.
H의 사랑 표현은 친구들이 보기 힘들었는데, 나는 시험 기간에 몇 번 본 적이 있다. 친구들은 시험공부에 지쳐 젊음의 객기로 술을 마시러 가고, D는 앉은 자리에서 뻗어 책상에 침을 줄줄 흘리면서 자기를 택한 어느 날이었다. H와 나는 까만 과 점퍼를 입고 편의점에 간식을 사러 다녀와 나는 화장실에, H는 공부하던 과방에 직행했다. 화장실에 갔다가 과방에 들어가려고 했던 내 눈에 보인 것은 평소엔 보이지 않던 H의 사랑에 빠진 눈이었다.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는 D-침을 질질 흘리며 코를 골기 직전의 상태였다-의 앞자리에 앉아 책상에 엎드리듯 팔을 괴고 D를 그렇게 한참을 보던 H의 모습은 영화에서나 보던 몇 년은 지난 애틋한 사랑 같았다. 'H는 D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같은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지만, 그 모습을 보면 H의 사랑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나는 분위기를 망치는 눈치 없는 친구는 되기 싫어 과방에 온 티를 내지 않고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보고 있었다-음습한 것 같지만, 주변인의 러브 스토리는 좋은 안줏거리가 아닌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한 가지를 빤히 보기엔 나름 긴 시간을 D를 H는 정말 보고만 있었다. 쪼그려 앉은 내 다리가 저려올 때 즈음, 비염으로 인해 색색거리며 숨소리를 내기 시작한 D의 코끝을 검지로 톡 친 H가 한숨과 함께 일어나 편의점 봉투를 뒤적이는 거로 그 몸이 움츠러드는 사랑의 광경이 끝이 났다. 며칠 뒤,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그 광경이 꿈 같기도 했지만 이따금 보이는 H의 미소에 나는 그의 사랑을 짐작하곤 했다.
이런 H의 사랑은 100℃의 물처럼 바글바글 끓지 않았다. 대충 7~80℃ 정도라고 가정해보자. H의 사랑은 끓고 있지 않다. 한 번의 데이트로 3℃ 정도 사랑이 깊어진다. 이럴 때 H가 데이트를 통해 얻는 에너지가 1000이 아닌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기름과 물을 똑같은 냄비에 똑같은 양을 넣어 똑같은 불 위에 올려놓자. 무엇이 먼저 100℃에 가까워질까? 대부분의 사람이 기름인 걸 알 것이다. 두 액체에 전해진 열(에너지)도 같다는 걸 알 것이다. 사랑도 같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같은 사랑을 했는데, 두 사람 사이의 차이가 있다면 그건 그 두 사람 사이의 성향 차이 때문이다. 두 사랑이 가진 사랑의 에너지는 같다. 같은 시간 동안 같은 장소에서 사랑했다면, 두 사람이 다른 양의 사랑을 하고 있을 리 없다. 이를 망각해선 안 된다.
앞서 말했듯, 사람들은 온도만 보고 에너지의 총량이 같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는 대부분의 사람은 경험을 통한 것일 것이다. 끓지 않는 주전자에 방심했으나 화상을 당한다던가, 저온 핫팩에 화상을 입는다던가. 낮은 온도에 만만하게 봤다가 큰코다친 사람들이나 겉모습이 다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마저도 일부는 또 낮은 온도를 만만하게 보고 똑같은 사고를 겪는다.
핫팩은 그리 뜨겁지 않은 온도인데 왜 화상을 입는 것일까? 핫팩에서부터 나오는 에너지를 구해보자. 핫팩에서 1초당 10의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치자. 그 핫팩을 1분 쥐고 있었다고 하면 핫팩을 쥐는 동안 손바닥에 도달한 에너지는 얼마일까? 구한 사람은 어떻게 구했나? 내가 당신들의 생각을 읽어 보겠다. 당신들은 1초당 나온 에너지에 60을 곱했을 것이다. 그래서 600의 에너지라는 결론을 도출했을 것이다. 당신들은 지금 우주의 법칙 하나를 깨우쳤다. 총 에너지는 횟수(시간)에 횟수 당 에너지(시간당 에너지)를 곱한 것이라는 당연하지만 이 세상이 돌아가게 만드는 법칙을 알게 된 것이다.
자, 우리가 이야기하던 사랑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여러분도 아는 지인 커플-기왕이면 헤어진 전적이 있는 지인들로-의 경우를 대입해보길 바란다. D와 H뿐만 아니라, 모든 사랑에서 주고받는 사랑의 총량을 총 에너지라고 하자. 표현을 주는 온도라고 해보고, D와 H에게 적용해보겠다. D는 표현이 많은 높은 온도의 사람이다. H는 표현은 적은 낮은 온도의 사람이다. 이 단계에서 계산을 끝내면 안 된다. 거듭 말하지만 사람들이 자주 간과하는 것이 있다.
사랑 총량을 구하기 위한 수식은 어떻게 하면 될까? 일단 사랑이 드러나는 횟수에, 그 한 번의 양을 곱해야 할 것이다. 횟수는 온도로 이미 정했다. 그 양은 무엇일까? 그 온도가 되는 사랑 표현의 깊이라고 해보자. 너무 기니까 비열값이라고 해보자. D와 H의 온도가 다르니 각각 계산해 보자.
D의 사랑 총량 = D의 온도 * D의 사랑 깊이
H의 사랑 총량 = H의 온도 * H의 사랑 깊이
여기에서 앞서 말한 내 말 하나를 가정으로 가져와 보자. '둘이서 하는 사랑의 총량이 서로 다를 리 없다.'를 식으로 세우면 이렇게 된다.
D의 사랑 총량 = H의 사랑 총량
결국 이 식은 이런 형태로 바뀐다.
D의 온도 * D의 사랑 깊이 = H의 온도 * H의 사랑 깊이
여기에서 D와 H의 온도가 다르다는 걸 이미 우린 알고 있다. 그런데 D의 사랑 깊이와 H의 사랑 깊이가 같다고 할 수 있나? 같다고 하는 사람은 글을 읽지 못하는 어린아이일 것이다. 내 전제가 틀렸다고 말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내 전제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며, 내 까칠한 친구들을 팔아넘긴 것이 아니다. 모든 연애가 전부 동일한 양으로 서로를 사랑한다고 보기엔 어렵다. 연애는 서로의 감정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특수한 목적을 갖고 이루어지기도 하기에 그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실제로 에너지도 위에서처럼 마냥 단순하지 않다. 저렇게 단순하다면 이 세상의 모든 석사·박사들이 고통받을 일이 없지 않나-나는 대학원생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표현이 적은 쪽의 사랑이 폄하되지 않도록 사람 사이의 차이를 존중해달라는 것이다. 실제로 H는 이런 이유로 골머리를 앓다가 D에게 이별을 고한 적이 있다. 충격에 따진 D가 H를 잡기도 전에 H가 자리를 피했고, 소주 두 잔의 주량을 가진 D가 저녁부터 술을 먹자며 진상을 부렸다. 한 시간 만에 꽐라가 된 D를 보며 친구들끼리 서로 누구를 욕해야 하나 눈치를 보던 중-솔직히 이땐 진상을 부리는 D를 패고 싶었다-, D가 해 떨어지기 전부터 술을 먹었다는 소식을 들은 H에게서 연락이 왔다. 술집 계단까지 찾아온 H는 내 얼굴을 보자 '히잉'하며 바로 울어버렸다. 본인이 헤어지자고 하고 울어 젖히는 H를 어르고 달래 돌려보냈지만, 한동안 H의 눈은 부르터서 보는 사람들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D는 한 달이 지나고 나선 나름대로 마음 정리가 끝난 사람처럼 굴었지만-지 딴에는 H가 신경 쓰이게 해서 재결합하려는 의도였단다-, H는 도통 그런 거에 느린 사람이라 꼬박 몇 달을 D를 피해 다니고 눈물로 눈화장을 하고 다녔다. 헤어지자고 하고 환승 이별 당한 사람처럼 구는 H에 D가 멱살을 잡고 끌던 날 D는 우리 과를 뒤집어엎었다. 뭐하냐는 D의 말에 H는 뚝뚝 울면서 '널 사랑하지 않는대'라고 했다고 했다. 전해 들은 것 같은 말투에 D는 그 말의 근원지를 찾아 과를 뒤집어엎어 몇 학번 위 선배를 존경했다-반어법인 걸 알아둬라-. 물론 D와 H는 그날부터 다시 연애를 했다. H의 우는 모습이 진짜 못생겼다면서 까슬한 소매로 H의 얼굴을 벅벅 문지른 D는 그 뒤로 몇 년이나 H를 놓아주지 않고 있다.
D와 H뿐만 아니라 이런 경우의 배드엔딩은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봐왔기에 하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조금 덜 사랑한다고 느껴도 그건 착각이거나 헤어짐의 징조이다. 그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겠지만, 막을 노력이라도 하기 위해선 사랑에는 역학적인 관계가 있다는 걸 알아둬라. 사람마다 비열값은 다르고, 같은 사랑을 해도 사랑의 온도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의 온도가 달라도 사랑의 총량은 같을 수 있다. 이걸 아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진리와 행복에 가까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