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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죽었고 과거는 자유롭다

요이

부연 하늘은 꼭 우리가 밟고 지나간 눈길 같다.

너는 말이야, 우리가 보았던 녹음을 기억해?

 

 

 

 

 

내일은 죽었고 과거는 자유롭다*

 

*제목 발췌 │허연, P는 내일 태어나지 않는다

 

 

 

 

 

 

유독 겨울이 길었던 그해, 온갖 방송에서는 대재앙이 올 거라고 했다. 망가진 행성의 궤도, 혼돈, 태양의 죽음. 도통 알 수 없는 말들이 온 세계를 덮었고 사람들은 전쟁이나 난 것처럼 서로를 상처입혔다. 사람들을 따라 있는 돈을 털어 음식을 사고, 방한복을 사고, 먼 친척의 안부를 묻고. 누나의 손에 이끌려 진을 다 빼고 나서야 제대로 뉴스를 마주한 이혁재는 넋이 나간 채로 가만히 스크린을 바라보다 이내 그것을 이해하지 않기로 하였다. 세기말 종말이라던가, 지구 종말 시계라던가 하는 것들은 하등 믿을 것이 못 되었으므로 이번 종말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겠다는 것이 이혁재의 결정이었다. 사실 이혁재에게 속보의 내용이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깊게 알고 싶진 않았다. 달을 사랑하고, 우주를 동경했으나 아무래도 그것을 알기에는 배워야 할 눈앞의 세상이 무척이나 거대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내일 당장 이동해를 만나 주말 새에 일어난 어마어마한 일들에 대해 한껏 떠들다 농담을 몇 번 던지고, 괜히 극한의 상황을 가정해서 동해를 놀리다 말면 그만이었다. 이혁재는 괜히 자신을 옥죄는 듯한 주변 소음에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야, 동해야. 어제 티비 봤어? 그러니까,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이혁재는 흥미로운 듯, 그러나 어딘가 무심한 말투로 제 앞에 선 이동해를 향해 말을 던졌다. 그런 이동해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곤 다른 말 없이 반쯤 흘러내린 이혁재의 코트를 단단히 여며 주었다. 혁재야, 정말 춥다. 이제는 패딩 입고 다녀, 응? 이혁재의 시선은 달랑이는 코트 단추에 잠시 머물러 있다, 곧 투박한 이동해의 손끝에 또 잠깐 멎었다가, 이내 어딘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이동해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죽는 게 무서워? 하고 대뜸 물었다. 귓가를 울리는 덤덤한 물음에 멈칫한 이동해는 움직이던 손을 완전히 멈추고 이혁재를 바라보았다. 이동해는 이혁재를 안아야 할 사명이 있었다. 눈으로 보나 실제로 대해 보나 아이가 무척 약하고 여리다는 데에서 오는 강한 연민인 건지, 본인이 없으면 그저 사소한 일뿐인 것도 깔끔하게 하는 법이 없는 이혁재를 향한 보호 본능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딱히 알 필요도 없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고 당연하게도 그렇게 했다. 그렇게 이어진 관계는 점차 부풀어서 이혁재는 이동해의 작은 세계가 되고, 이번에도 이동해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동해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건 언제나 두려웠고 그것이 내 안의 사람이라면 더더욱,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서 느끼는 절망감과 삶에 대한 회의 같은 것들을 이동해는 잘 알고 있었다. 삶의 저편, 죽음의 그늘에는 언제나 살을 에는 것만 같은 바람과 함께 쿰쿰한 냄새가 난다. 이동해가 문득 종말이 두려워진 이유는 우습게도 이혁재 때문이었다. 정말로 종말이 온다면? 어차피 함께 마지막 밤을 맞이할 테니까. 그렇지만 너를 먼저 잃고 싶진 않은데, 그래도 내가 너를 먼저 놓으면 안 되는데. 안부도 물을 수 없게 되면 어떡하지. 이동해는 겁이 많았다. 이동해가 이혁재를 보며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우정을 초월한 무언가였고, 자신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이혁재의 주변을 이루는 세계가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이 복잡하고 미묘한 것들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머리를 굴리느라 이동해는 얼떨결에 얼어버린 꼴이 되었다. 멀뚱멀뚱 서 있는 동해의 얼굴을 보며 느리게 눈을 끔뻑이던 이혁재는 팔꿈치로 이동해의 옆구리를 툭, 치며 덩치만 보면 뭐든 하나도 무서울 것 없는 사람 같은데, 하고 말했다. 이혁재는 이 세계에 큰 미련이 없다. 설령 태양이 빛을 잃고, 지구가 우주의 저편으로 힘없이 팽개쳐진다고 해도, 너무나도 작은 우리가 우주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저 소멸하는 것 뿐이라면, 내가 죽은 줄도 모르고 꿈속을 살면 되는 거 아닐까?

 

 

- 나는 안 무서워.

- 진짜?

- 어차피 그렇게 될 거라면, 만화방 비디오나 훔칠 거야. 죽기 전까지 잔뜩 볼래.

- …… 그래, 그러자. 같이 해 줄게.

 

 

이동해는 어쩐지 이혁재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 ⦁ ⦁

 

몇 해의 겨울. 어느 순간부터 끔찍하고도 폭력적인 기상이변이 지속되면서 우리는 더이상 봄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계속되는 혹한을 이기지 못하고 얼어붙은 사람들이 발에 하나 둘 채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동해의 손을 꼭 붙잡고 신이 우리를 찾지 못하는 곳으로 몸을 숨기기 위해 애썼다. 비명마저 들리지 않는 곳. 살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그 강렬한 욕망을 꺾는 죽음의 기운. 이곳은 그저 잿빛 무덤이었다. 세상은 먼지를 잔뜩 머금은 것처럼 색채를 잃어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해가 지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온종일 끔찍한 재앙의 현실을 곧대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동해를 따라 걸으며 온기를 잃고 널브러진 사람들의 방한 점퍼를 벗길 때마다 삶은 참 더럽고 추악한 것이구나, 당장이라도 아무 건물의 옥상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럴 때마다 제 손을 더욱더 세게 잡아오는 이동해의 온기에, 동해가 느낄 그 불안정한 마음을 알았기에 나는 붙잡은 손의 힘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숨이 멎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의 미약한 온기를 느낄 때마다 우리는 조금 울게 되었다.

 

이동해는 언제나 추위에 빳빳해진 외투를 꼭 껴안고 제 온기로 그것을 데웠다. 품에 있던 외투는 늘 나의 것이었고, 이동해의 품 또한 나의 것이었다. 서로의 체온이 시린 마음을 녹이고, 그렇게 조심스레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삶에 대한 의지는 이미 대부분 잃었지만 어째선지 죽을 수가 없었다. 동해의 눈이 슬퍼 보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산 사람의 온기가 계속해서 내 몸에 닿고 있기 때문일까. 우리는 가끔 몇 해가 지났는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하는 것들을 골똘히 생각해보곤 했다. 해가 지지 않으니 우리는 계속해서 하루를 살고 있는 거야, 이게 온 우주가 말하는 하루의 정의일 지도 모르지. 시답잖은 말들을 하면서 웃기도 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더욱 이상한 세상 위에 숨을 뱉고 있으니 이상할 건 하나도 없다고.

 

 

 

더이상 인적이 없는 작은 학교의 문을 열었다. 손끝에 닿는 철제 문고리의 차가운 감촉이 소름 끼쳐 동해의 곁에 더욱 바싹 붙었다. 철퍽, 철퍽… 이동해와 나의 발소리는 당장이라도 천장을 무너뜨릴 듯 크게 울렸고, 온기가 감돌지 않는 학교 안은 아무래도 나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다. 이동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동해와 손을 잡고 걸었던 보통의 겨울날을 떠올렸다. 징그럽게. 이혁재가 네 애냐? 하고 은근한 조롱의 말을 던지는 같은 반 친구들에게 알 바야, 라고 말하며 웃던 이동해의 옆모습을 기억한다. 그때는 단순하게 사는 것 같은데도 모두에게 호감을 샀던 이동해를 보며 약간의 질투와 함께 막연한 동경을 느끼곤 하였는데, 나는 그런 이동해가 나를 감싸고 돈다는 게 또 너무 좋아서, 쓸데없는 것들에 모종의 우월감을 느꼈더란다. 인기 많은 친구를 질투하는 것도, 이동해를 기준으로 어떠한 순위를 나누는 것도 그저 창피하고 우스운 짓이었기에 언제나 그런 나를 쥐어박기 바빴는데, 지금은 그 모든 행동이 하나의 감정으로 귀결되는 것이었음을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학창 시절, 학교는 낮과 밤의 얼굴이 너무나도 달라서, 불 꺼진 교실에 가만히 엎드려 있으면 내가 알지 못하는 친구들이 내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왜인지 음산한 기운에 몸을 떨다가도, 그저 외로운 아이들이 숨을 죽이고 모여 있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하면 나도 너도, 모두가 불쌍하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꽃기운이 한창일 무렵, 가난이라는 벽에 부딪혀 내 세상의 주인이 나 아닌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의 뒤를 엄습해올 때. 암담한 마음이 나의 밤을 뒤덮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그럴 때면 두 팔로 제 머리를 최대한 감싸고 책상 위로 엎어져 눈을 질끈 감았다. 집에 가지 말까? 나는 모두를 사랑하고, 가족은 언제나 내게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이었으나 현실의 먼지에 묻혀 사랑하는 감정이 희미해질 때, 그때마다 나는 조금 눈물이 나왔다. 이동해와 나는 언제나 마지막까지 남아 텅 빈 교실을 함께 나서곤 하였다. 명확히 이야기하면, 속상한 마음에 짓이겨져 있던 나를 일으켜 세워 함께 걸어 주었던 것이다. 오늘은 어느 길로 갈까, 따위의 말들을 늘어놓으며 가방 속에 느릿하게 교과서를 챙겨 넣는 이동해의 모습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리고 이동해 또한 자신의 움직임을 애써 재촉하지 않았다. 나는 고요하고 태평한 그 순간들을 좋아했다. 대부분의 날은 마을을 빙빙 돌아 몇 시간을 허비한 채로 대문 앞에 닿았다. 그마저도 들어가고 싶지가 않아서, 근처 공터에 책가방을 내팽개치고 앉아 서로 애꿎은 발장난을 치다 겨우 돌아갈 때가 많았다. 이동해는 뭐든 괜찮다고 말했다. 할 수 있는 거면 그렇게 해 주겠다고 했다. 언젠가 나의 눈치를 살피며 다른 친구에게 약속에 가지 못할 것 같다고,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이동해를 본 적이 있는데, 나는 그런 모습을 애써 모른척하며 생각했다. 정말 뭐든 해줄지도 모르겠다고. 이동해는, 정말로 내게 헌신할 거라고. 그런 무서운 생각을 했다.

축제가 끝나고 아이들의 열기가 완전히 식은 교실 안, 나를 숨 막히게 안으며 무대에서 너밖에 안 보이더라, 하고 말해주던 이동해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당연한 듯이 제 것을 풀어 나에게 바르게 매어준 하얀 목도리를, 허공에 흩어지는 하얀 입김을 몇 번이고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세상은 조금씩 어둑해지지만 그것뿐이었다. 밤이 올 것 같은 기분을 느꼈으나 완전한 밤이 오면 세상은 정말로 끝이 날까,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마다 제 안에 퍼지는 막연한 공포가 싫어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쩐지 세상에는 동해와 나, 우리 둘뿐인 것만 같았고 신에게 왜 빨리 우리를 눈감게 하지 않으시냐고, 왜 자꾸만 우리는 죽음의 굴레 속을 걷기만 할 뿐이냐고, 무릎을 꿇고 완전한 종말을 애원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이동해의 뒤통수를 말없이 바라본다. 우리, 그냥 확 죽어버릴까. 이렇게 계속 봄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손을 놓지 않는 너에게 차마 입 밖으로 내기 어려워 마음속으로, 아득히 먼 산을 향해 닿는 메아리처럼, 그렇게 말했다.

 

급격하게 얼어붙는 세상에 작고 초라한 우리는 더이상 당해낼 힘이 없었다. 점차 우리의 종말이 가까워짐을 느꼈다.

 

 

 

⦁ ⦁ ⦁

 

혁재야.

요새 자꾸만 여름이 생각난다.

 

 

이동해는 대충 눈에 보이던 2학년 교실의 뒷문을 열고 들어가선 사물함에 등을 기대고 앉아, 붙들린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따라 앉는 나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낮은 시선으로 바라본 교실은 어쩐지 자꾸만, 자꾸만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여름?"

 

"그냥, 우리 집에서 너희 집 방향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커다란 등나무라던가. 애들이랑 축구하고 들어와서 젖은 옷은 창틀에 던져 널어놓고, 다 같이 드러누워 있었던 거. 그런 것들."

 

"네 친구들한테 먼저 인사라도 해볼걸. 이젠 기억도 잘 안 나.”

 

“그럼 걔네도 좋아했을 거야.”

 

“……여름이라. 교실은 꿉꿉하고, 너는 싫다는데도 자꾸 어깨동무나 하고. 땀 뻘뻘 흘리고 나한테 붙는 건 무슨 심보래."

 

"음, 그건, 그냥 그러고 싶었어."

 

"이 멍청이가……."

 

 

이동해는 옅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손을 뻗어 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제 어깨를 작고 느릿하게 토닥이는 손길이 익숙하고 다정했다. 나는 여름에 뭘 하고 지냈지. 되도록 함께, 같은 기억을 회상하고 싶었으나 여름의 향이 나는 기억은 대부분 휘발되어 무엇이 현실이고 꿈이었던가,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여름을 좀 더 즐겨 놓을 걸 그랬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잖아. 더위를 피해 보겠다고 등나무 밑에 앉아서 네 사진을 열심히 찍어주던 것도, 잘못하고 필름실을 열어 버려서 등나무 밑에서 찍었던 사진이 하얗게 다 날아가 버렸던 것도, 애들이랑 다 같이 계곡으로 놀러 갔던 날, 둘이서 몰래 회비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던 것도.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진짜 바보같아. 더위라는 거, 점점 까마득해지는 게 꼭 전생 같다. 그치?

 

이럴 줄 알았으면, 정말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좋아한다고 조금만 더 일찍 말할 걸 그랬어. 일찍 알아챘다면 뭔가 달랐을까.

 

널 사랑해.”

 

 

이동해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지나고 보면 이동해의 모든 순간은 그저 사랑으로 점철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땐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명백한 사랑을 앞에 두고 자꾸만 애먼 감정을 의심하기 바빴기 때문에. 생각해 보면 이동해는 언제나 온몸으로 내게 사랑을 말했다. 사랑과 우정은 그저 한 끗 차이, 그러나 단어의 모양처럼 또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드는 사랑의 기운을 등 뒤로 숨기는 날이 많아질 때면 결국 감정의 경계는 무너지고 이내 명백한 차이를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있지도 않은 미래를 두려워했던 나는 애써 모든 것을 사춘기의 장난으로 대충 얼버무리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간단한 말도, 그 어떤 고백도 우리가 하면 어딘가 우스워지는 것이었다. 나는 추위에 점차 아득해지는 정신을 애써 다잡으며 툭, 이동해의 가슴께에 얼굴을 기대고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우리는 꽤 오래도록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동해는 여름날의 기억을 계속해서 되풀이했다. 아스팔트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그리웠고, 땀 냄새가 짙게 밴 교실 안이 그리웠고, 선크림을 꼼꼼하게 챙겨 바르는 이혁재를 보는 그 순간이 그리웠다. 무르익는 감정을 터트리는 순간이 일찍 왔다고 하면, 우리는 조금 더 따뜻한 겨울을 맞을 수 있었을까. 너는 나를 사랑했을까. 동해는 텅 빈 교실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이동해의 시선에는 얼굴을 마주 보고 웃는 서로가 있고, 책상 위로 엎드려 잠든 이혁재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자신이 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무엇이 되었든 또 다른 꿈으로 도피하고 싶은, 계속해서 잠들고만 싶은 지금. 이동해는 제 가슴 언저리에 얼굴을 묻은 이혁재의 숨이 유독 뜨겁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혁재는 자신에게 스미는 감정을 인지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르는 겨울날의 순간을, 그 파편들을 모아 품에 안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계가 있다.

 

 

그렇구나, 이동해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리고 나는 너를 정말, 정말로.

 

 

이동해는 이혁재의 양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며 자신에게서 떼어 놓고는 아무 말 없이 이혁재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혁재는 제게 진득하게 따라붙는 이동해의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당장 어떤 말이든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바깥만큼이나 창백한 이혁재의 피부는 살을 에는 바람 속에 바싹 말라 곧 피가 배어 나올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동해는 그런 이혁재의 살갗을 투박한 손바닥으로 두어 번 쓸어내리고, 이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이혁재의 부르튼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 조심스럽게, 다정한 몸짓을 하고서. 이동해는 물기라곤 전혀 없는 아이의 살갗이 가여워서, 맞닿은 이혁재의 입술을 자신의 혀로 몇 번이고 훑어 주었다. 질끈 감은 눈, 이혁재의 가는 속눈썹이 파들거렸다.

너덜거리는 기억마저 미련 없이 떠나보낼 수 없는 나를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너를 사랑하지 않는 나를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고. 이동해와 이혁재는 비로소, 어리석게도 지금에서야 자신을 직면한 채 같은 마음을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스러지고, 생명력을 잃은 것들이 앙상한 윤곽을 드러내고 나서야 자신을 속이던 것 안에 숨겨진 뼈의 모양을 봤다.

그것은 분명히 단단한 것이어서, 마치 나무와도 같은 형체를 하고 있었다.

 

 

“춥지.”

곧 있으면 입술이 완전히 다 찢어질 것 같았어.

 

 

한참이 지나 떨어진 두 입술 사이에는 새하얀 입김이 허공을 대신 메웠다.

 

 

 

 

⦁⦁

 

이혁재는 늘 나에게 소중하고, 사랑하…… 나. 나의 어린 시절. 어두컴컴한 방 안, 책상 스탠드에 불을 밝힌 채 오롯이 그 빛에 의존해 있는 날이면 대부분 생각에 빠지는 것이었다. 괜히 책상 위에 놓인 만화책을 들춰도 봤다가, 책상 위로 대충 던져두었던 딸기우유 맛 막대사탕을 손에서 굴려도 보다가, 이내 골똘히 사색에 잠기고는 했다. 혁재가 딸기우유를 좋아하니까, 나는 받았는데 먹지도 않으니까, 그렇게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여자애가 준 것을 받아 챙겨둔 것이었다. 사랑하는 것은 모두 소중하지만 소중한 것을 모두 사랑하느냐 묻는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내 친구들, 소중하고 사랑하지. 이혁재는, 소중하고, 어……. 답이 쉬이 나오지 않는 것이 어딘가 이상했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이혁재에게 말하는 사랑은 무언가 한참은 다른 것이어서, 왜인지 쉽게 뱉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서 이혁재의 동그란 뒤통수를 가리키며 쟨 대체 뭐냐고 묻는 친구의 말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을 때, 이유를 알아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언젠가 친구들과 이혁재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때가 있었다. 한바탕 축구를 마치고 다 같이 운동장 벤치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던 참이었다.

야 이동해, 너는 왜 혁재 걜 그렇게 감싸고 도냐.

아, 왜.

시비 거는 게 아니라, 진짜로 궁금하잖아.

너랑 뭐, 엄청 오래된 애라던가 그런 건 또 아닌 거 아냐?

……그건 그렇지. 벤치 바닥에 손을 뒤로 짚은 채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의 자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쩌면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조금 더 각별한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이혁재의 얼굴을 떠올리면 언제나 연민인지 사랑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제 안에서 꿈틀댔다. 이야기의 물꼬를 텄던 그 친구는 이혁재가 하얗고 말라서 어딘가 불쌍하다고 말했다. 내 뒤에서 가만히 자길 바라보는 이혁재를 보고 있으면, 왜인지 비 맞은 어린 애 같다고, 그렇게 말했다. 불쌍한 게 아닌데. 이혁재는 재미있고 다정하다. 말로는 나를 이겨 먹으려 굴면서도 언제나 내 기분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혁재는 생긴 것만큼이나 여려서, 나를 상처입힐 수 없다. 가끔은 이혁재가 휘두르는 대로 휘둘려져도 좋다는 생각을 하고서 그 애를 만나러 가는데, 자신이 만들어 둔 어떠한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때면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필사적인지 묻고 싶었다. 분명히 젖은 눈을 하고 있는데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어딘가 분한 기분이 들었으나 알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뭐든 괜찮고, 실망 안 해, 하고 말해 주었다. 이혁재는, 이혁재는 내가 필요하고, 나는 그런 혁재가 필요하다.

그 애를 사랑으로 정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전혀 없었으나 어리숙한 사춘기의 나이에 사랑의 정의는 참으로 이상하고 어려운 것이어서, 네가 가여워서 그런 마음이 드는 거라며 이혁재에 대한 나의 마음을 쉽게 치부하려 한 적도 있다. 어쩌면 예정되지 않은 미래를 대뜸 의심했던 걸지도 모른다. 필사적인 부정에도 불구하고 머지않아 나는 순순히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가졌던 일말의 가능성을 내려놓았던 까닭은 이혁재가 치졸한 내 이기심으로 인해 제 안에서 작아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이혁재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느낀 적 없던, 여지 없는 사랑이었음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응. 이혁재는 늘 나에게 소중하고, 사랑하지.

 

 

 

 

⦁⦁⦁

 

동해야.

우리는 지금 몇 밤을 같이 하고 있는 걸까?

 

 

그게 그렇게 알고 싶어? 이동해는 건조하게 갈라진 이혁재의 손등을 쓸었다. 보통 이혁재가 지나간 하루를 세어 보려고 할 때면 그 애는 어딘가 조급하고 불안해 보였다. 이혁재는 삶의 형상을 자꾸만 그려보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이후의 삶을 상상하고, 새로운 아침을 갈망하는 일. 심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인 줄을 알면서도, 점차 삶에 대한 욕구가 피어오를 때면 이혁재는 늘 이동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래 맞아, 그런 건 알 바 아니지. 이혁재는 물기 어린 눈을 하고 이동해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겨울날의 동해를 제 눈에 오롯이 새겨두려는 듯한 절박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이동해는, 세상이 갑자기 흩어져 버린대도 괜찮았다. 괜찮을 것 같았다. 전생이니 후생이니 하는 것들을 믿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뭐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좋으니 다시 만나기만 하면 된다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이동해는 한껏 웅크린 이혁재의 작은 몸을 제 품에 안았다.

 

 

이제 그런 건 그만 생각해.

 

 

이동해는 이혁재의 정수리, 부드러운 머리칼 위로 턱을 붙이고 입꼬리를 유하게 올렸다. 이동해의 목소리는 어딘가 꿈결 같기도, 물속 같기도 했다. 네가 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좋다, 하며 제 품에 자신을 더욱 바짝 가두는 이동해의 말에 이혁재는 어쩐지 비참한 기분이 들어서, 이동해의 목덜미에 얼굴을 깊게 파묻고선 눈을 질끈 감았다. 이동해는 바들바들 떨리는 이혁재의 작은 몸을 고스란히 느끼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한 무력감, 내가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너를 완전히 감싸 안을 수 있을까, 너를 숨길 수 있을까, 생각해보곤 하는 것이었다. 우리도 참 끈질기지. 그저 살고 싶은 게 아니라, 너랑 내일을 살고 싶은 건데.

이동해와 이혁재는 아스라이 흩어지는 의식과 서서히 작별하며 생각했다. 봄이 오는 곳으로 가자. 우리가 나눈, 어쩌면 조금은 버거워 버렸을지도 모르는 사계절의 마음을 다시 안아 들고 그렇게 가자.

 

 

 

있잖아,

내일은 올까?

 

 

 

 

 

 

 

과거,

그 자유롭던 일몰.

 

교활한 미래를 내던지며

우주의 가호가 있기를.

신은 떠났고

신은 또 울었다.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 과거를 적어놓은 자

그자를 경배한다.

내일 부를 노래는 태양력의 한마디에 남아

P를 따라오지 않았다.

P는 거의 지쳤고

P는 내일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세상이 사라진다.

말더듬이로 살아갈 날조차 남지 않는다.

P는 과거로,

아름다운 사막으로 가고 있다.

 

실패한 호르몬은 과거를 향한다.

 

과거만이 죽지 않았다.

익숙한 심장 소리를 내며

과거 몇 개가 행진해 온다.

과거는 가장 자유로운 것들을 운반하고

 

그때 만나는

씨앗 하나 뿌리지 못하고

과거를 맞이하는 자의 환희.

사막 같은 환희.

호르몬은 늘 과거를 향한다.

내일은 죽었고 과거는 자유롭다.

© 2021 HaeEun Collab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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