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보카도 딸기볶음밥
20세기 소녀..
게이 이동해. 무슨 [아보카도 딸기볶음밥] 같은 기이한 단어였다.
동해는 삼십 년 살면서 남자에게 네 번 고백 받아봤다.
첫번째, 대뜸 술 먹고 전화 와서 너만 생각하면 선다고 울부짖었던 미친놈.
두번째, 흩날리는 꽃잎 아래에서 사실 나 널 좋아한다고 애틋하게 중얼거렸던 20살 연상의 미친놈.
세번째, 뭐라는지 알 수도 없는 개발새발의 글씨로 지속적인 편지를 보내오던 미친놈.
네번째, 동창회에서 만나 깔쌈하게 사실 나 너 좋아했다고 한 마디 툭 내뱉고 잘 지내라며 사라진 고등학교 동창.
혁재는 동해의 20년지기 절친으로서 그때마다 동해의 반응을 다 지켜봤었는데, 동해는 네 번 전부 눈에 띄게 불쾌해했다(특히 첫번째는 죽여버리려고 했다). 물론 네 번 중 세 번이 또라이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애초에 동해는 제 인생에 남자와의 사랑이 있을지도 모른단 전제 자체를 두지 않았기에 그 고백들이 절절했든, 사랑스러웠든 불쾌해했을 것이다. 동해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억지로 만드는 브로맨스 분위기도 농담도 질색이었다. 가끔 기분 좋을 때 친구들의 장난을 받아주더라도 결국 다 ‘장난’이었다. 조금이라도 과하다 싶으면 정색했다. 그야말로 남자와의 두근두근 러브스토리♡같은 건 질색인 사람이었단 뜻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이혁재의 의문이 발생한다. 근데 나한텐 왜 이러는데?
헤테로 이동해는 이혁재에게 틈만 나면 사랑한다고 말한다.
전혀 달아오르지 않은 얼굴로,
차가운 손으로,
뜨거운 이혁재의 손을 감싸쥔 채로.
아보카도 딸기볶음밥
1.
이혁재는 바이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다. 이혁재조차도 몰랐다. 군대 다녀온 뒤 이동해로 몽정하기 전까지는. 울고 싶었다. 팬티 박박 빨면서 고뇌했다. 나 이동해 좋아하냐? 그럴 리 없었다. 이동해 제멋대로인 것도 짜증났고 맨날 제 팬티에 낙서하는 것도 짜증났고 맨날 저 없으면 죽을 것처럼 굴어서 공공연하게 저를 이동해 보호자 포지션으로 만들어버린 것도 짜증났는데 이동해를 좋아한다고? 그럴 순 없다고 빽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미친 듯이 자문했다.
너 이동해랑 뽀뽀할 수 있어?(이미 자주 했다.)
이동해랑 키스할 수 있냐고.(술자리에서 몇 번 해보긴 했다.)
이동해가 너 거기 잡으면 화 안 나겠냐고?!(자주 잡혔다.)
이동해랑 사귈 수 있냐?(이미 그런 오해 받은 지가 수 년째다.)
이동해 얼굴 보면 꼴려?(방금 몽정했다.)
이동해랑, 이동해랑…
이씨, 이동해랑 잘 수 있냐고…(…가능할지도…)
아냐!!!! 그만, 그만… 흐어어엉…
팬티 빨다 말고 결국 변기 커버 위에 걸터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혼란스러웠다. 5분 정도 그러고 앉아서 비죽비죽 눈물을 뽑는다. 그리고 다시 5분 뒤 눈가 벅벅 문지르고는 다시 냉정한 표정으로 팬티를 빡빡 문질렀다. 표정은 냉정하게 지어놨지만 자꾸 눈물이 질질 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동해? 이동해를? 내가? 말도 안돼. 에이씨… 무심코 팔로 눈을 문지른다. 비누거품이 눈으로 침투하면서 안 그래도 벌겠던 눈이 더 시뻘게졌다. 눈물이 더 질질질 미친듯이 흘렀다. 혁재는 엉엉 울면서 물을 끼얹는다. 사랑을 자각한 인간은 좀 머저리같다더니, 그 말이 구라는 아니었다. 혁재도 거울 보면서 생각했다. 지금 나 진짜 개..바보같다. 혁재는 비누거품을 다 닦아내고도 눈물이 안 멈춰서 계속 물을 끼얹었다. 팬티를 빨러 들어온 건지 얼굴을 빨러 들어온 건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었다. 아 나 이동해 안 좋아한다고오오… 듣는 사람도 없는데 쓸데없는 변명을 계속 해댄다.
진짜 좋아한단 뜻이었다. 기구했다.
2.
그래도 혁재는 한 번 찔러라도 보고 싶었다.
"동해야 넌 남자 좋아하냐?"
"미쳤냐?"
"아님 아닌거지 왜 화를 내…"
"아 소름 돋잖아. 뭐 그런 걸 물어. 너는 남자 좋아해? 아니잖아."
"...어 뭐. 그렇지."
집 와서 울었다.
이동해 멍충이. 지옥에나 가라. 현실은 나 혼자 지옥 가겠지만.
3.
그러니까 이건, 이동해 탓이었다.
이동해는 남자도 안 좋아하면서 내내 이혁재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이혁재도 이동해만 아니었으면 남자 좋아할 일 없었을 거였다. 그도 그럴 게 이혁재도 이동해랑 똑같은 대한민국의 80년대생 남자였다. 세상의 세뇌적인 이성애에 절여질대로 절여진 이들 중 하나였던 이혁재의 인생에 이동해가 드러누우면서 모든 게 꼬이기 시작했다.
맨날 예쁜 얼굴 들이밀고 이혁재 손 붙잡고 배시시 웃으면서 혁아 사랑해, 나 너밖에 없어— 이딴 말을 뱉은 이동해 탓이다. 다른 남자애들이 사랑한다고 끌어안으면 남자끼리 징그럽게 왜 이러냐고 질색하면서 이혁재한텐 본인이 직접 그 잔인하고 다정한 사랑 고백을 술술 뱉어낸 이동해 탓이다.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전날마다 이혁재를 붙잡고 옷을 골라달라고 하고 모의 데이트까지 해보면서 이혁재 볼에 뽀뽀하고 웃던 이동해 탓이다. 술도 못하면서 술자리에 이혁재 있다고 하면 기꺼이 와서는 다른 여자한테 번호 따이고 혁재 어깨에 기대앉아서 그 여자랑 문자하던 이동해 탓이다. 죽어도 남자는 안 좋아할 것 같은 이동해 탓이다.
이동해 개새끼. 평소 욕설이 드물던 이혁재가 결국 뇌까렸다.
곱씹을수록 잔인했다. 진짜 개새끼였다.
이동해의 잔인한 다정함이 반복될 때마다 이혁재는 점점 뜨거워졌는데 이동해는 언제나 평온하고 시원했다. 이혁재를 불지옥에 처넣어놓은 당사자면서 이동해는 늘 시원하고 맑게 웃고만 있었다.
이런 순간마저도 이동해를 떠올리는 이혁재의 머리가 뜨거웠다.
혁재는 생각했다. 어쩌면 내 탓이라고, 이동해를 좋아한 내 탓.
또 울고 싶어졌다.
이혁재가 울보가 된 이유의 9할은 이동해가 차지하고 있었다.
4.
혁재는 오늘까지 해서 도합 세 번 남자한테 까였다. 두 번은 이동해한테 까인 거고(본인은 깐 줄도 모르고 있었지만) 오늘은 이동해를 잊기 위해 게이바에서 새로운 사랑을 찾아보려 시도했다가 까였다. 아니 사실 까였다고 하기에도 좀 애매했다. 혁재는 도저히 그곳의 끼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혁재도 무대 체질이라고 자부해왔는데, 도저히 이 조명… 습도… 온도… 음악… 스킨십같은 것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몸을 부벼오는 형님은 너무 거대하고 무서웠다… 넌 어린애가 고자냐며 저를 걷어차줬을 땐 정말 다행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혁재는 자신이 이런 곳에 올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냥 밀키스나 한 잔 마신 뒤 어이구 죄송합니다 아 죄송합니다 계속 하세요 네…를 연발하며 거기서 나왔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이동해와 마주친다. 첫눈 내리는 날, 게이바 앞에서, 짝사랑하는 친구와 그의 친구들을. 대문짝만하게 [맨즈타운⚣]이 적힌 건물을 뒤에 두고. 혁재는 갑자기 운석이 떨어져서 자기 머리 위에 안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야, 이혁재!”
“어, 이동해…”
“여기서 뭐해?”
동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혁재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혁재 친구들은 이동해가 다 아는데, 이동해 친구는 매번 볼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이다. 낯선 사람들은 게이바에서 나온 혁재를 신기하단 눈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혁재는 생각할 틈도 없이 변명했다.
“잘못 들어갔어.”
“어? 어딜?”
아 변명하지 말걸. 혁재는 또 귀가 타오르는 것 같아서 급하게 귀를 가린다. 아니, 이 뒤에… 이상하더라고… 동해 친구들은 킥킥거렸고 동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혁재는 이 머쓱함을 무마해보려고 괜히 웃음을 터뜨리면서 동해를 퍽 쳤다.
“아 실수로!!! 이상한 데 들어갔다구… 아 왜 두 번 말하게 해 멍충아.”
“아, 저기? 야 놀랐겠네. 괜찮아?”
동해 빼고 모두가 혁재 말을 안 믿는 눈치였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혁재 귀까지 다 들렸다. 게이바를 어떻게 실수로 들어가냐? / 내 말이… 게이네. 이혁재는 순간 잘 되지도 않는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썼다. 억지로 입만 간신히 웃는 표정. 동해가 혁재의 그 표정을 못 읽을 리 없었다. 혁재를 빤히 바라보던 동해가 친구들 쪽을 돌아봤다.
“야. 너네 말을 왜 그렇게 하냐.”
“어? 어… 들렸냐? 미안, 장난이야.”
혁재 쪽으로 건성의 사과가 돌아왔다. 혁재는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아 뭐 진짜 게이도 아닌데… 괜찮아. 웃음 섞어 말하면서도 목에 바늘이 꽂히는 것 같았다. 동해는 그런 혁재를 또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혁재는 애써 앞만 봤다.
“야, 너네 그냥 집에 가라.”
“뭐? 야 이동해 너 오늘 소개팅 나와준다매 미친새꺄. 너 없으면 여자애들 안 온다고.”
“그건 너네 문제고. 나 혁재랑 놀아야 돼.”
“야, 너 진짜…”
“어차피 너네도 나 소개팅 때문에 부른 거잖아. 걍 가.”
게이바 앞에 바보처럼 서 있는 이혁재의 손을 잡아챈 이동해는 뻔뻔하게 친구들을 거기 버려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혁재는 늘 그랬듯이 머쓱하게 동해와 그 친구들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얼렁뚱땅 목례하고 동해에게 끌려간다. 어느 정도 말없이 성큼성큼 앞서 걷던 동해가 혁재 쪽을 홱 돌아봤다.
“혁아, 우는 거 아니지?”
“…뭐래 멍청아. 내가 왜 울어.”
“아까 너 표정이 너무 울 것 같애서.”
“…”
“아님 추워서 우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제 장갑을 벗어 혁재에게 끼워준다. 맨손으로 혁재의 손을 감싸고 한 번 후 불어주기까지 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이제 따뜻해? 혁재는 말없이 동해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예뻤다. 진짜 짜증 날 정도로. 예쁘고, 잘생겼고, 다정하고. 이내 헛웃음을 터뜨린 혁재가 동해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 고맙다. 이거 따시네.
“아까 걔네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런 애들인 줄 몰랐는데, 애들이 못됐네.”
“…어.”
“그리고 심심하면 불러 인마. 나 너 연락이면 자다가도 나오는 거 알잖아.”
“넌 너무 귀찮아.”
“우리 혁이 또 서운하게 말하네.”
이동해는 이혁재를 너무 잘 알았다.
이혁재가 자기 좋아한단 거 빼고 다 알았다. 이혁재는 그래서 이동해가 미웠다.
양손에 퍼지는 장갑 속 가짜 온기에 또 이혁재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직도 손이 시렸다.
5.
게이 이동해. 아보카도 딸기볶음밥. 둘 중 더 말 되는 것은?
당연히 아보카도 딸기볶음밥.
아냐, 그래도 동해가 바이일 확률. 동해는 바이다, 아니다, 바이다, 아니다, 바이다, 아니다……… 원래 풀잎점은 마지막 남은 뿌리까지 뜯는 거다. 바이다. 우와, 동해가 바이라니.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꼬셔보겠습니다. …그냥 내 정신이 바이바이다. 실없는 생각을 멈춘 혁재가 동해 쪽을 쳐다봤다. 야 이동해. 대답 없이 혁재의 어깨 쪽으로 머리를 옮겨 기댄 동해가 눈썹을 까딱였다. 말하란 뜻이었다.
“너. 아보카도 딸기볶음밥같은 거… 먹을 수 있냐?”
“아보카도 딸기볶음밥?”
“어.”
“굳이? 그냥 아보카도 김치볶음밥은 안 돼?”
“그것도 이해 안 가긴 한데 안 돼.”
"왜?"
"걍 안 돼."
“…너도 같이 먹는 거야?”
이동해가 아보카도 딸기볶음밥을 먹을 확률 = 이동해가 바이일 확률로 대입 중이던 이혁재의 말문이 막혔다. 어?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가 에라 모르겠다 식으로 대충 대답했다. 어차피 진짜 먹을 것도 아니니까.
"어. 같이 먹어줄게."
"너랑? 그럼 먹지 뭐."
"헐."
"뭐야, 근데 그런 게 진짜 있어?"
"아니, 너 조용히 해 봐… 나 좀 생각할 게 있으니까…"
"나랑 말하면서 생각해."
"잡음이 없어야 하는 명상이야."
그냥 던졌던 질문은 이혁재가 이동해를 더 사랑하게 만들어버렸다.
이혁재는 사랑이 낭만적이라고 말한 사람이랑 좀 긴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다. 저는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어요… 사랑 그거 할 만 하긴 하죠 좀 토할 것 같고 힘들고 어지럽고… 아보카도 딸기볶음밥같은 괴식도 나랑 먹으면 먹을 수 있다는 개소리에도 설레고… 이혁재의 얼굴은 타오르는데 오늘도 이동해만 멀쩡했다.
"혁아, 근데 너 아보카도 싫어하잖아."
"네가 내 꺼 먹어주겠지."
"엉."
"…너 정말 최악이다."
"?! 야 갑자기 왜?!"
헤테로 진짜 짜증난다.
진짜 개짜증난다.
6.
오늘의 이동해는 또 게이에게 고백을 받았다고 했다. 이동해 인생 다섯 번째로 받는 게이의 고백이었다. 놀랍지도 않았다. 동해는 예쁘고 잘생기고 귀엽고 재수없고 어쩌고저쩌고 플러스 이혁재의 주관적인 견해 오백 개. 혁재는 말없이 신발 앞코로 땅을 긁으며 동해의 불평을 곧이 곧대로 듣고 있었다.
"왜 사내새끼들이 나한테 고백을 하는 거야? 혁아 나 예쁘냐?"
예쁘지, 존나… 구태여 입 밖으로 뱉지는 않고 그냥 어깨만 으쓱했다. 수년째 남자한테 고백 받아서 고민인 불알친구를 좋아하고 있는 남자라니. 본인 신세가 너무 기구했다. 한참이나 동해의 궁시렁거림을 듣고 있던 혁재가 슬그머니 물었다.
"…야 근데, 너 취향인 사람이 진짜 하나도 없어?"
"애초에 남자잖아."
"아, 뭐, 하긴…"
피눈물만 났다. 다시 씁쓸하게 괜히 손만 만지작거린다. 그때 잠깐 조용해져서 골똘히 생각하던 이동해가 또 습관처럼 혁재 손 위로 제 손을 덮었다.
"아 있다."
그러고는 확 고개를 들이밀고 웃으면서 말한다.
"우리 혁재?"
이혁재는 웃지 못했다. 제 얼굴 앞으로 디밀어진 이동해 얼굴만 빤히 바라보다가 그냥 웃는 것도 포기하고 고개 돌렸다. 이런 와중에도 뜨겁고 설레는 제 자신이 가장 최악이었다.
7.
이혁재도 상상 못했을 것이다.
이동해로 딸치다가 이동해한테 걸리리라고는.
심지어 동해가 두고 간 옷에 코를 박고 이동해 이름 부르고 있을 때,
어김없이 자기 집처럼 들어온 이동해와… 딱.
8.
"미안, 진짜, 그러니까 이건,"
"이혁재."
"나, 나, 나 사실 너 좋아하나 봐. 나 너 좋아하는데, 안 좋아할게. 오늘부터 안 좋아할게. 동성애 치료 캠프, 그것도 갈 거구, 여자애도 만날 거구. 때리고 싶음 때려. 그래서 너 화 풀리면 때려. 나랑 친구 안 해도 할 말 없는데, 그래도, 그래도..."
"혁아."
동해가 혁재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쥐었다. 눈물범벅으로 축축해진 뺨에 시원한 손이 맞닿는다. 마주 본 동해의 표정은 예상과 다르게 평소처럼 다정했다. 아니, 평소보다 더 다정했다. 혁재는 또 숨이 막혔다. 너는 네 다정함이 얼마나 사람 목을 조르는지 모르지.
"내가 너 고추 한두 번 보니?"
…걍 내가 목 조를까. 혁재가 허탈하게 웃었다. 동해도 빙그레 웃는다. 혁재가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동해야, 그런 문제가 아니고 내가 널… 혁재의 말을 끊고,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이 슬 움직이면서 혁재의 눈가를 문질렀다. 넌 혁재잖앙. 네가 나 좋아하면 좋지, 나도 너 좋아하니까. 그리고 누구 맘대로 친구를 안 해. 너 나랑 평생 봐야 돼. 우정만 잔뜩 담긴 건조한 감정들이 쏟아졌다. 혁재는 맥이 풀렸다. 그게 아니고 난 너 보면 꼴린다고 미친놈아… 방금 니 눈으로 봤으면서… 차마 입 밖으로 뱉지는 못했다. 이혁재도 이동해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동해는 결코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정도의 상황까지 왔는데,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러. 이혁재는 또 한 번 까였다. 비참한 기분으로 입을 다물었다. 더 입을 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위의 이유도 이유였지만, 열이 오를대로 오른 제 뺨을 문지르고 있는 동해의 손도 너무 침착하고 시원했기 때문에.
9.
한동안 혁재는 동해를 피했다.
폰도 안 보고 도어락 비번도 바꾸고 칩거 생활에 돌입했다.
원래 생활을 유지하다간 사랑에 깔려죽을 것 같았다.
10.
칩거 3일째, 혁재는 꿈을 꿨다.
눈이 펑펑 나리는 겨울날, 이동해가 결혼하는 꿈.
꿈 속의 이동해는 매번 이혁재에게 해주던 것들을 신부에게 해주고 있었다. 자기 목도리를 둘러주고, 제 장갑을 벗어 끼워주고, 제 모자를 씌워주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주고, 양 뺨을 감싸고 예쁘다고 웃어주고.
그걸 지켜보는 이혁재는 쓸쓸한 잠옷 차림이었다.
11.
깨어나보니 열이 펄펄 끓었다. 몽롱한 정신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너는 한겨울에 왜 문을 열어놓고 자냐? 이동해였다.
이혁재와의 연락 두절 3일째, 불안감을 견디지 못한 이동해는 늘 그랬듯 오늘도 당연하다는 듯이 제멋대로 침입했다. 저번에 지 맘대로 찾아와서 딸치는 것까지 직관해놓고도 이동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랬다.
"너… 도어락 바꿨는데, 어떻게…"
"그니까. 너 어떻게 비번을 바꾸냐? 나 머쓱해서 죽는 줄 알았어."
"…애초에 내 집이잖아… 그리고 결국 어떻게 들어온 건데…"
"넌 내 손바닥 안이지."
황당해할 기력도 없었다. 이동해의 무단침입에 익숙한 이혁재는 몇 번 헛웃음만 짓고는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평소처럼 태클 걸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정신을 다 부수어놓는 고열은 제대로 된 판단을 세우기 어렵게 했다. 혁재는 끙끙 앓으면서 중간중간 저도 모르게 진심을 자꾸만 얼핏 흘렸다.
"나가아."
"왜."
"너 옮아…."
"같이 있기만 하는데 뭘 옮아."
"아프지 마 멍충아…"
"나 안 아파, 혁아. 너나 아프지 마."
"우리, 동해… 아프면 안 돼…"
마지막 말에 동해의 행동이 멈칫했다.
우리 동해. 괜시리 마음 한구석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12.
혁재가 잠들어있던 동안 사실 동해는 좀 울었다. 당연스럽게 입력한 도어락이 열리지 않아 당황했을 때부터 이미 눈물은 고여있었고, 어머님 찬스를 쓰고 가까스로 들어온 집 안에서 창문 다 열어놓고 뜨거운 숨을 쌕쌕 뱉고 있는 혁재를 봤을 땐 아예 울컥 터졌다. 야 이혁재! 고함소리에도 반응 없이 덜덜 떨고만 있는 혁재를 보고는 너무 겁이 나서 당장 문 싹 닫고 이불이란 이불은 다 내와서 혁재 꽁꽁 싸놓고…
단순 감기 몸살일 거라고 이성적으로는 생각이 되는데 이동해에게는 감성이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컸다. 어떻게 추스를 틈도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니 막을 방도가 없었다. 눈을 벅벅 문지른 이동해가 혁재의 목끝까지 이불을 덮어주며 속상한 목소리로 질책했다. 아 진짜, 나 부르지. 왜 나 피해 진짜… 그렇게 중얼거리는 도중 머릿속으로 며칠 전 저를 좋아한다고 말하던 혁재의 모습이 휙 스쳐지나갔다. 그때 봤던 혁재의 불안한 얼굴이 낡은 비디오 영상처럼 재생됐다. 그리고 일부러 혁재의 고백을 무시했던 자신의 모습도, 비참해보이던 혁재의 얼굴도. 회상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후회심이 몰려들었다. 그치만 혁재는 남자잖아. 혁재는… 혁재는… 혁재인데. 혁재는 혁재지. 혼자 입을 달싹이던 동해가 잠시 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벌겋게 달뜬 채로 색색거리고 있는 제 오랜 친구 혁재를 멍하니 내려다보면서 깨닫는다.
혁아, 혁재야. 나, 너를.
13.
이동해의 지극정성이 효과가 있었는지, 이혁재는 겨우 이틀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았다. 아프기 전 이동해를 피했던 것이 머쓱하게 또다시 같은 날의 순환이었다. 이동해는 이혁재 무릎을 베고 눕고, 이혁재는 쇼파에 기대 앉아 티비를 보고. 아니, 어쩌면 아프기 전보다 더 붙어있었다. 동해가 혁재가 걱정된다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내내 제 옆에 붙어앉아 과잉보호를 펼치는 이동해에 질린 이혁재가 부루퉁하게 던졌다. 네가 나랑 사귀냐? 과해.
평소같았으면 사귈까? 하고 이혁재만 심란해질 농담을 던지고 푸하하 웃었을 이동해가 오늘은 말이 없었다. 그냥 묘한 표정으로 혁재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혁재는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아, 이동해, 이동해 경보. 심각 경보.
14.
근데 혁아. 나 너 좋아하나?
미친 헤테로의 폭탄 발언이었다.
15.
"너 나 보고 꼴려?"
"가끔?"
"너 나랑 키스할 수 있어?"
"이미 몇 번 했잖아."
"너 나랑 손 잡을 수 있어?"
"자주 잡잖아."
"너 남자 좋아해?"
"아니?"
"근데 날 어떻게 좋아해."
"넌 혁재잖아."
"난 남자잖아."
"아 어쩌라고. 넌 혁재잖아."
뭐 이딴 무논리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혁재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동해는 자기도 답답하다 못해 억울하단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혁재에게 이 논리 없는 대화가 유난히 짜증나는 이유가 있었다. 이동해는 그냥 단순히 우정인데 또 나 혼자 등신같이 설렜을까 봐, 그게 무서워죽겠는데 이동해는 사람 속도 모르고 계속 넌 혁재니까~ 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만 늘어놓고…
"그러니까 동해야, 나는 남자잖아."
"응."
"넌 남자를 안 좋아하지."
"응. 아니 근데"
"들어. 근데 네가 나랑 잘 수 있어?"
"응."
"…"
"넌 못해?"
"…"
"난 너랑은 다 할 수 있는데."
혁재는 혼란스럽다. 동해야, 넌 진짜로… 미쳤나 봐. 머리가 뜨거웠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동해는 이런 말을 잔뜩 늘어놔놓고 혼자 평온할 것이다. 수년 삽질 역사를 가진 이혁재에게 이딴 헷갈리는 대답은 너무… 너무 잔인하고 괴로웠다. 진짜로. 존나. 너무.
입술을 꾹꾹 깨물던 혁재가 토해내듯 감정들을 쏟아냈다.
"나는, 동해야. 나는 너랑 있으면 머리가 너무 아퍼. 뜨거워 막. 손도 뜨겁고 귀도 뜨겁고 얼굴도 뜨거워. 그리고, 그리고, 그래 꼴려!!!!! 너로 몽정도 했어!!!!!"
"오…"
"너 말하지 마. 기다려. 너랑 있으면 그냥 미치겠어, 어? 미치겠다고… 아보카도 딸기볶음밥같은 거 나랑 먹어준다고는 왜 해. 나랑 있으면 그걸 왜 먹어. 그 쓰레기같은 거 왜 나랑이면 먹어주는데. 어? 너 때문에 진짜 그냥 너무 뜨거워서 폭발할 것 같애. 근데 넌 내가 이렇게, 어? 활활 타고 있는데. 활활 타는데 넌, 네가 내 손 잡으면, 넌 멀쩡하고, 너 손은 차갑고 뽀송하고, 나만, 나는, 난, 심장이… 막 2배속으로…"
"혁아."
"난, 지금도, 헉, 아 숨 막혀… 나느은, 멍청아, 너랑 얘기할 때마다…"
"야야야, 혁재야."
급발진. 말 그대로 급발진한 이혁재를 바라보며 입만 헤 벌리고 있던 이동해가 허겁지겁 혁재 손을 붙잡아 제 가슴팍에 끌어왔다. 이혁재는 더 펄쩍 뛴다. 나도 너 가슴 큰 거 알거든 너 진짜 이런 식으로 나한테 혼란을…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쿵쿵쿵쿵쿵쿵.
…어라?
"어…"
"아직도 차가워?"
"……"
"차갑냐고."
"…따뜻하네…"
뜨거운 두 사람이 마주봤다.
수십 년 멈춰있던 온도의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