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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은 언제 하나요?

곰푸

쿵. 저 멀리서 스탭이란 표시인 목걸이를 걸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을 보자마자 은혁은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네가 왜...?, 여기에...’란 생각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마음과 다르게 잘못 보지 않았다는 듯 저 앞에 있는 사람은 어릴 적,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아니, 정말 말 그대로 그때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달라진 거라곤 그때보다 조금은 긴 머리에 안경 정도였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올 것만 같았다.

 

“...혁아, 은혁아!”

 

매니저가 불렀다. 이런저런 혼란스러운 생각을 하던 은혁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 어? 왜.”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러도 못 들어? 사진작가님한테 인사하러 가야지. 저 앞에 머리 묶으시고 안경 쓰신 분 보이지? 오늘 너 찍어주실 에이든 작가님이야. 이야, 작가님이 무슨 연예인 뺨치게 잘생기셨냐. 실물도 엄청나시네. 촬영 시작하기 전에 가서 인사하ⵈ”

 

“자, 잠깐! 저 사람이 누구라고? 에이든? 작가님?”

 

“저번에 자료 주지 않았어? ‘에이든 리’라고 한국분이신데 유학 갔다 오셔서 다들 이름은 영어로 알고 있어. 근데 부를 때는 딱히 상관 안 하신대. 한국 이름은, 뭐더라. 바다 이름이었는데.”

 

이동해. 모를 리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또 이동해가 포토그래퍼를 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모르는 게 당연했지만. 자료는, 사실 보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로 바빠 자료를 확인하지 않고 그냥 넘겼었다. 전날에 잠깐이라도 볼까 했지만 어차피 곧 보게 될 텐데 하며 그냥 넘겼던 게, 이렇게 될 줄이야. 인사하러 가지 않을 거냐는 매니저 형의 말에 갈거라고 했지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뭐라고 해야 되지? 반갑다고? 오랜만이라고? 날 기억하긴 하나? 저를 툭 치는 매니저 형의 손과 동시에 들리는 말에 생각이 멈췄다.

 

“안녕하세요. 포토그래퍼 이동해라고 합니다. 오늘 촬영 관련해서 할 말이 있어서.”

 

“아, 작가님.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죠? 인사드리러 갈 참이었는데.”

 

매니저가 어서 인사하라는 듯 눈짓을 줬다.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은혁이라고 합니다. 오늘 촬영 잘 부탁드려요. 전 잠깐 긴장 좀 풀고 올게요.”

 

하하.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아. 망했다. 왜 그렇게 웃었지. 은혁은 그냥 그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생각했던 말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냥 의례적인 그런 인사를 했던 것 같다. 눈은 볼 수 없었다. 왠지 눈을 보면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그 감정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올까 봐. 심장이 뇌의 통제를 벗어난 듯 빠르게 뛰었다.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되는데, 괜찮다고 생각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촬영 전까지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켜야 했다.

 

“아이고. 쟤가 원래 저런 애가 아닌데. 작가님이 너무 잘생기셔서 부끄러운 가봐요. 저한테 말해주시면 은혁이한테 전달할게요”

 

“괜찮습니다. 잘생긴 거야 은…혁씨가 더 잘생겼죠. 그럼 ⵈⵈ라고 은혁씩에게 전해주시겠어요?”

 

돌아서는 작가의 얼굴은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만약 봤다면 실연당했다고 생각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지금 너에게 처음 보는 사람이구나. 자신의 눈을 피한 채 인사하던 혁재를 떠올렸다. 자신의 기억 속에선 항상 눈을 보며 말했는데 오늘 자신의 눈을 피하는 혁재를 보니 왜 이렇게 되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조금만 왼쪽으로. 네. 그대로. 등의 말을 하며 촬영이 진행됐다. 은혁은 팔에 얼굴을 기댄 채 그리움의 대상의 흔적을 쫓는 것처럼 시선을 멀리했다. 그리운 듯하면서도 씁쓸해 보이는 은혁의 눈빛은 몇몇 스텝과 Milagro의 직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은혁은 표현력이 뛰어난 모델로 유명했다. 컨셉을 색다르게 해석해서 좋은 결과물을 내었기에 관련 업계에선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모델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그건 여러 잡지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Milagro”라는 매거진은 계절마다 한, 두 번씩 컨셉을 정해 그 컨셉에 맞는 모델과 포토그래퍼를 구하는 독특한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관련 업계에서 큰 인정을 받고 있어 모델들이나 포토그래퍼들에게는 한 번쯤 선택되고 싶은 선망의 매거진이기도 했다. 이번 컨셉은 ‘그리움’으로 Milagro는 은혁을 선택했다. Milagro의 연락을 받은 후에 은혁은 그리움이라는 컨셉에서 그리움의 모순에 초점을 두었다. 그리워하는 모습과 동시에 그리워하지 않으려는 그런 모순된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Milagro는 ‘그리움’의 색다른 해석이 맘에 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선택된 포토그래퍼가 이동해였다. 은혁의 해석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포토그래퍼를 찾던 중 눈에 들어 온 것이 에이든 리, 이동해였다. 유학파로 마음에 드는 풍경을 찍는 것을 위주로 찍지만, 인물을 찍을 때는 마치 직접 그 사람이 된 것처럼 감정을 잘 잡아내서 찍기로 유명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 스튜디오를 차리고 개인 작업을 위주로 해 큰 기대를 안 했지만,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된 섭외에 Milagro은 또다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열을 올렸다. 대부분의 준비는 포토그래퍼의 스튜디오에서 하겠다고 요청하는 바람에 크게 준비할 건 없었다. 처음엔 준비를 거부하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상했지만, 오늘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 느낀 것은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Milagro에서 생각한 분위기와 거의 맞고 스튜디오에 있는 은혁의 분위기와도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Milagro의 직원들은 예상보다 이번 촬영이 정말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좋다. 어렸을 때보다 더 다채롭고 깊어진 표현이 좋았다. 또 스텝과 자연스레 장난치는 저 장난스런 웃음이 그때와 같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기뻤다. 그리움의 모순이라는 촬영 분위기로 가라앉은 현장을 생기있게 만들었다. 카메라를 보면 다시 변할 그의 표정이 좋았다. 동해는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포토그래퍼로서 은혁이라는 모델의 표현력이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은혁이 생각한 해석을 들었을 때 약간의 기대를 했다.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리움이라는 게 모순이 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리워하는 마음밖에 없는데. 그래서 더 궁금했다. 그리움의 모순. 그리워하는데 왜 그리워하지 않아야 할까. 알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고 있으니 왜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럼 잠시 쉬었다가 다음 촬영 시작할게요!”

 

첫 번째 촬영이 순조롭게 끝났다. 마치 여러번 합을 맞춰본 것처럼 작가와 모델의 합이 좋았다. 뛰어난 표현력과 그걸 고스란히 담아낸 사진은 뭐라 할 게 없었다. 사실 은혁에게 이번 컨셉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컨셉을 알았을 때는 멈칫했지만 여태 자신이 겪어왔던 감정이었으니 그 누구보다 잘 표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렌즈를 보는 촬영도 자신 있었다. 렌즈 너머로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면 되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포토그래퍼가 이동해라는 걸 몰랐을 때 얘기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겠지만, 그 대상이 바로 앞에 있는데 떠올릴 생각을 하니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까 매니저 형이 전해준 말을 듣고 나니 순수히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릴 자신이 없어졌다. ‘보고 싶은 사람 없냐고?’ ‘어. 최대한 보고 싶은 사람을 생각해달래.’ 방금 전 촬영에서도 괜히 제 마음을 들킬까 조마조마했는데 이젠 눈을 마주쳐야 하는 상황이다. 실제로 마주치는 건 아니지만 왠지 이동해가 든 카메라의 렌즈가 이동해의 눈을 보는 것만 같아서 자신의 감정이 다 보이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카메라를 들고 저를 찍는 이동해를 보는 것은 심장에 해로웠다. 처음엔 당황해서 눈을 보지 못했다면 이제는 의식해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쉬는 시간에 매니저 형에게 청심환 있냐고 묻자 없는데 사다주냐는 말에 됐다는 말을 했다.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이판사판이었다.

 

 

●●●

 

 

오지 말 걸 그랬나. 동해는 빨개진 귀를 하고서 안주만 먹었다. 오래 걸릴 줄 알았던 촬영이 하루 만에 끝나 기뻐한 직원들이 회식이라는 의견을 냈다. 원래 회식은 참여하지 않았지만 은혁도 간다는 말에 정말 오랜만에 회식에 참여했다. 하지만 역시 술과 자신은 맞지 않았다. 저 건너에 앉은 은혁은 잔을 보니 꽤 마신 거 같았다. 자신과 다르게 술을 잘 마시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취하긴 하는지 살짝 상기된 볼이 옛날에 입에 달고 살던 딸기 우유 같았다. 꽤 오래 쳐다봤는지 눈이 마주쳤다. 마주치자마자 피하는 건 조금 상처였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의 놀란 눈은 토끼 같았다. 촬영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사장님~ 역시 더 안 드시는 건가요?”

 

“ㅎㅎ 이제 한계에요.”

 

동해가 반 정도 남은 잔을 들고 말했다. 오늘은 취하는 걸 볼 수 있을 줄 알았다는 직원의말에 취해가는 중이라며 웃었다. 전혀 안 그래 보인다는 은혁의 매니저의 말에 오래 일한 스튜디오 직원이 사장님 주량이 맥주 한 잔이라고 했다. 안 듣는 척 동해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은혁은 동해의 주량을 듣자마자 놀랐다. 생긴 거는 완전 잘 마시게 생겨놓고 주량이 맥주 한 잔이라는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동행의 귀가 빨개진 게 보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저를 쳐다보는 눈에 당황하자 동해가 웃었다. 화르륵. 저가 빠졌던 어릴 때와 변함없는 웃음에 얼굴이 빨개졌다.

 

“어? 작가님 가셨어요?”

 

벌써 갔나? 붉어진 얼굴을 진정시키려고 화장실을 다녀온 은혁은 잠시 멈칫했지만 취하는 거 같다고 잠깐 나갔다는 말에 주량도 그렇고 빨리 취하네라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진정하고 온 참이지만 계속 떠오르는 그 웃음에 은혁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채워지는 잔을 비웠다. 계속 마시다 보니 진짜 취하는 것 같아 안되겠다고 생각해 바람 좀 쐬고 온다고 말하고선 추운 가을 바람에 대비해 겉옷을 챙겨 나갔다.

 

아. 이동해.

 

문을 열고 나간 앞에는 들어오려던 동해가 있었다. 갑작스런 마주침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은혁의 뒤로 가게 문이 딸랑 소리를 내며 닫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동해를 피하려 했지만 붙잡은 동해의 손에 움직일 수 없었다.

 

“이혁재. 혁재야. 나 잊었어?”

 

그 이후로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를 부르는 이동해의 목소리에 움직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이동해가 서 있었다. 울 것 같은 얼굴에 저도 모르게 아니라고 답했다. 혁아, 내가 잘못한 거 있어? 라는 말에 그게 무슨 말이냐고 답해야 했지만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아무말도 못했다. 매니저가 이제 가자는 말을 하려고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결국 이동해에게 아무말도 못하고 헤어졌다. 은혁은 그런 거는 그냥 전화로 하지 하는 생각을 하며 차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온 동해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을 잊지 않은 은혁에 다행이면서도 피하는 것을 보니 정말 자신이 잘못한 일이 있었던 것인지 헷갈렸다.

 

 

●●●

 

 

18살의 여름. 이동해와 이혁재는 중학교 때에 이어 고등학교에 가서도 붙어 다녔다. 둘은 그냥 그게 당연한 것처럼 항상 같이 다녔다. 둘을 잘 아는 친구들은 싸우지도 않고 오래 붙어 다닌다며 대단하다고 했다. 항상 싸우는 거 같아도 조금 있으면 금방 붙어 다닐 걸 알아 다른 친구들은 둘이 투닥거리면 그러려니하고 냅뒀다.

 

“아! 이동해! 선크림 바르고 나가라고!”

 

오늘도 그냥 나가 놀려는 동해를 혁재가 붙잡았다. 귀찮다고 말하는 동해에 혁재가 이동해를 끌고 와 자리에 앉혔다. 살 타도 상관없다는 동해의 등짝을 한 대 때리고는 선크림을 짰다. 손을 달라고 했지만 그냥 웃고만 있는 동해에 빨리 손 내놔라하는 혁재, 기왕 네 손에 짠 김에 발라 달라는 동해의 말은 반 친구들에게 일상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또 발라주는 혁재에 반 친구들은 저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발라 주지하며 매일같이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동해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문이 났다. 이동해와 이혁재를 매일 보는 반 친구들은 그게 말이 되냐고 생각했다. 맨날 이혁재가 떨어지라고 해도 안 떨어지는 이동핸데 그런 이동해가 여자친구를 사귄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함께 등교하는 둘을 보고 소문이 정말 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반 여자애가 찾아올 때까지. 다른 반 여자애가 찾아와 부르자 동해는 따라 나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반 친구들이 혁재에게 달려갔다.

 

“야, 야. 쟤 진짜 저 여자애랑 사귀는 거야? 진짜로?”

 

“아 그런가 보지. 저리 가. 나 잘거야.”

 

혁재는 혁재대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여태 이동해가 여자친구를 사귄 적은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고백을 받는 것도 처음인 거 같았다. 고백하면 받아주는 거였으면… 그럼 그냥 내가 먼저 고백할걸. 혁재가 가지 않는 친구들에 엎드리며 생각했다. 중학교 때 전학 온 이동해는 옆자리인 저에게 먼저 다가왔다. 누가 봐도 잘생긴 얼굴에 친해지자 하는 이동해에 혁재는 얼떨결에 대답했고 그 뒤로는 항상 먼저 말을 걸어오는 동해에 자연스레 친해졌다. 같이 지내다 보니 항상 다정한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면서 저에게 보이는 다정함이 좋았다. 너무 달라붙어 귀찮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계속 붙어있는 녀석이 싫지 않았다. 그러다 중학교 때 여자애들끼리 동해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 들었을 때, 왠지 빼앗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이동해를 좋아한다는 것을.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말했다가 저에게 보이는 다정함이 사라질까 봐. 그랬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동해가 고백을 받아 사귀기로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 이혁재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로 했다.

 

“좋아하는 거야?”

 

“아니 딱히.”

 

“그럼 왜 사귀는 거야,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그냥. 사귄다는 게 어떤건가 싶어서.”

 

그럴거면, 나랑 사귀면 되잖아. 입 밖으론 절대 낼 수 없는 말이었다. 이동해가 여자친구를 사귀고 나서도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딱히 변한 건 없었다. 등하교를 같이하는 건 계속했고 학교에서 붙어있는 것도 계속되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주말에 만나는 시간이 조금 줄어든 정도? 그리고 가끔씩 반으로 오는 여자친구에 이동해를 조금 피하는 것뿐이었다. 이동해가 여자친구랑 같이 있는 모습을 볼 때는 가슴이 아팠다. 같이 있는 모습이 잘 어울렸기 때문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는 없어 보였다.

 

“혁아~ 영화 보는 거 안 잊었지?”

 

“안 잊었지. 내가 그걸 어떻게 잊냐. 너가 일주일 내내 귀 옆에다 말했는데.”

 

띠리링. 띠리링.

 

작게 웃던 이동해가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전화를 받았다. 들리는 목소리를 보니 여자친구의 목소리였다. 혁재는 먼저 갈까란 생각에 발을 옮겼지만 이어지는 동해의 말에 멈췄다.

 

“그날은 안돼. 약속 있어.”

 

무슨 약속이냐고 묻는 소리에 영화라고 짧게 답했다. 혁재는 대충 그날 놀러 가자고 전화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다. 슬프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그냥 친구고 걔는 여자친구였으니까. 그래서 입 모양으로 그냥 놀러 가라고 했다. 전달이 잘 안 됐는지 이동해는 얼굴을 찌푸렸다. 제 입으로 두 번 말하는 건 힘들었지만 다시 한번 말했다. ‘영화는 다음에 보면 되잖아. 그냥 놀러 가.’ 이걸 꼭 내 입으로 말하게 한다.

 

“혁재랑 영화 보러 가기로 약속했어. 노는 건 다음에 해.”

 

그 말을 끝으로 동해는 전화를 끊었다.

 

“야, 왜 그래. 그냥 놀러 가지. 영화는 다음에 봐도 되잖아.”

 

“나랑 영화 보러 가는 거 싫어?”

 

“ⵈ아니.”

 

“그럼 됐지? 가자.”

 

그러고선 내미는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혁재는 자신이 너무 싫어졌다. 동해가 여자친구와 놀러 가자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과 영화 보러 가는 것을 택했을 때 기뻤고 안심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너무 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숨기는 것만으로는 언젠가 한 번 터질 것 같았기에 혁재는 피하는 걸 택했다. 혁재는 아프다는 핑계로 다음 날 학교를 가지 않았다. 그리고선 동해에게 아무 말 없이 전학을 갔다.

 

 

●●●

 

 

아. 이동해한테 말해야 하는데. 집으로 돌아온 은혁은 결국 이동해의 말에 답을 하지 못한 것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만날 구실도 없었고 연락처도 몰랐다. 촬영도 끝났고 회식까지 했기 때문에 남은 일정은 편집밖에 없었다. 하지만 보통 그런 건 편집자를 만나지 작가를 만나지 않는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이동해는 어릴 때와 똑같은 얼굴이었고 저에게 보였던 다정한 웃음도 그대로였다. 결국 오늘 깨달은 건 아직까지 이동해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연락 할 방법을 못 찾은 채 편집 기간이 지나고 Milagro매거진 발매가 시작되었다. 원래도 인기가 많았지만 이번 것은 평소보다 훨씬 반응이 좋았다. Milagro직원들도 예상을 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좋은 반응에 기뻐했다. 모델의 표현이 고스란히 담긴 화보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Milagro에서는 봄의 컨셉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이어서 하는 게 어떠냐는 말이 나왔다. 지금의 컨셉과도 어울리게 잡았던 봄의 컨셉을 이어서 보여준다면 훨씬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대부분의 직원들도 동의했기에 Milagro은 이동해와 은혁에게 연락했다.

 

은혁 역시 발매되고 나서 Milagro를 보는데 자신이 감정이 너무 드러난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촬영장에서 볼 때는 잘 몰랐는데 이렇게 인쇄된 것을 보고 있으니 더 실감이 났고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들도 생각났다.

 

두 번째 촬영에서 은혁은 피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로 했다. 물론 촬영에서만이지만. 카메라 앞에 서자 이동해가 카메라를 통해 저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 그만둬야 하나란 생각도 했지만 이미 결심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다. 은혁은 자신이 먼저 도망쳤으니 그리워하는 것도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일상에 생각보다 많이 있던 이동해라는 존재가 사라지자 어딘가 텅 비어버린 것만 같았다. 도망친 건 자신이었는데. 은혁은 그렇게 그리워하는 것을 숨겼고 숨기다 보니 괜찮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너무 숨기다 보니 자신조차도 숨긴 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동안 숨겼던 그리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니 그 어느 촬영보다 촬영이 잘 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촬영에 진심을 다했었지만 이번에는 진짜 진심이었으니까. 다시 한번 Milagro를 보고 있자 부끄럽기도 하면서 조금 후련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은혁아!”

 

문을 열고 급하게 들어오는 매니저 형의 모습에 왜 그렇게 급하냐고 물어보자 기쁜 소식이 들렸다. Milagro의 다음 촬영 연락이었다. 보통 비슷한 컨셉이라도 같은 모델을 쓰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번 컨셉은 비슷함을 넘어서 이어지는 컨셉이어서 괜찮다면 또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은혁은 당연히 좋다고 했다. 작가님도 하냐고 물으니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Milagro는 계절마다 잡지를 발매하기 때문에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 기다리게 되면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더 빨리 만나고 싶었던 은혁은 결국 매니저 형에게 연락처를 아냐고 물었다. 모르지만 알아볼 수 있다는 말에 그럼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렇게 은혁은 이동해의 연락처를 얻을 수 있었다.

 

‘나 이혁재야. 다음 컨셉도 촬영 한다는 거 들었어. 그 전에 할 말 있는데… 만날래?’ ‘아, 번호는 매니저 형이 알려줬어.’

 

동해는 Milagro에서 연락을 받고 난 뒤에 온 문자에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혁재가 직접 말하는 듯이 문자 내용이 선명하게 들렸다. Milagro의 연락 후 먼저 연락이 오지 않으면 자신이 먼저 할 거였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연락이 왔다. 알았다는 문자를 보내자 시간이 언제 괜찮냐고 물었다. 편한 시간에 맞추라고 하자 한참 뒤에 시간과 스튜디오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보자는 문자가 왔다.

 

 

●●●

 

 

같이 안 있어도 되냐는 매니저의 물음에 괜찮다고 끝나면 연락하겠다고 하고 차에서 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먼저 와 있는 이동해가 보였다.

 

“매니저랑 같이 왔어?”

 

“아니. 데려다주기만.”

 

짧은 대화 뒤엔 침묵이었다.

 

“그럼, 다른 데 갈래? 아마 좋아할 거야.”

 

어색한 침묵을 깬 건 동해였다. 매니저 형은 이미 가 은혁은 동해의 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은혁의 기억 속엔 교복을 입은 동해가 다였는데 옆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우리가 많이 컸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하네. 혼자 생각한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그 작은 소리도 들은 건지 이동해가 웃었다. 내가 좋아한 다정한 웃음이었다.

 

“전에, 그거 무슨 말이야?”

 

“뭐가?”

 

“너... 잘못이냐고 했던 거.”

 

“아. 내가 뭐 잘못했어? 그래서 모른 척 하는 거야?”

 

“뭐?! 네가 잘못할 게 어딨다고...”

 

그럼 왜 피하냐는 동해의 말에 혁재는 대답할 수 없었다. 혁재의 침묵에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는 사이 차가 멈췄다.

 

와아. 깔끔해 보이는 카페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겉과 비슷하게 깔끔한 분위기면서 피규어 같은 걸로 작게 작게 꾸민 카페 내부가 보였다.

 

“여기 딸기가 주메뉴래.”

 

동해의 말대로 광고판에 뜬 딸기 프라페는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광고판을 보는 혁재의 눈이 반짝거려 맘에 들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에는 다락방처럼 되어 있다고 가보자는 동해의 말에 아메리카노와 딸기 프라페를 주문하고 기다렸다. 주문한 음료가 나오고 둘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다락방처럼 꾸며놓았다더니 정말 다락방의 느낌이 났다. 꾸며놓은 것을 보던 혁재가 여기 엄청 잘 꾸며놨다며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예전에 직원이 새로 생긴 덴데 맛있다고 하길래.”

 

누가 생각나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즐거워 보이는 혁재를 보자 웃음이 났다. 이런 걸 보면 정말 자신이 잘못한 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은혁은 프라페를 한 입 먹으며 정말 맛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은 기대하지 않은 듯 얘기했다. 그러다 저를 쳐다보는 눈길에 말을 멈췄다.

 

“너..너무 혼자만 떠들었네. 내가 보자고 했는데...”

 

“왜.. 피하는지 말 안 해 줄거야?”

 

동해는 정말 궁금해졌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니라면 왜 피하는 걸까. 그 말에 은혁이 고개를 숙였다. 이어지는 말에 은혁은 고개를 더욱 숙였다.

 

“그럼 전학 가는 건 왜 말 안 했어?”

 

은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둘 다 똑같은 이유였으니까. 동해를 좋아해서. 그런데 자신이 너무 못돼서. 하지만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기적처럼 만나게 된 이 인연이 깨질까 봐 두려웠다.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을 다그치지 않는 동해의 다정함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말해버리면 다시 마주친 이 다정함이 사라질 것 같았다. 결국 은혁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혁재가 진정하길 기다리던 동해는 떨어지는 눈물에 당황했다.

 

“혀..혁아.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돼.”

 

끝까지 다정한 동해에 은혁은 눈물이 흐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당황한 동해는 혁재의 머리에 손을 얹고 진정시키려 했다. 그 다정함이 혁재를 더 울리는 줄도 모르고. 크게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고 정말 서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우는 혁재에 동해는 손으로 혁재의 고개를 들었다. 눈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눈물에 동해는 잠깐 멈칫했지만 그대로 고개를 내렸다.

 

쪽.

 

짧지만 흐르는 눈물을 멈추기에는 충분했다. 동해는 금방 고개를 들어선 혁재가 좋아하는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혁재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싶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눈물은 들어갔고 방금 일을 생각한 혁재의 귀가 금방이라도 탈 것처럼 빨개졌다.

 

“너, 너.. 아니 지금 무슨?! 지금 뭐 하느ⵈ”

 

쪽.

 

아까와 같은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혁재의 눈은 동그랗게 떠진 그대로였다.

 

히끅.

 

“눈물 겨우 멈췄는데 이젠 딸꾹질이네.”

 

혁재는 지금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었다. 게다가 이제는 딸꾹질까지. 생각하면서도 딸꾹질이 나와 집중이 되지 않았다.

 

“너..너! 왜 나한테 키스해?? 히끅. 해도 내가 먼저 할거였는데!!”

 

약간의 울음과 당황한 목소리가 섞였다. 아. 망했다.

 

“아..아니.. 그니까 방금 그건.. 그러니까..”

 

은혁은 두려웠다. 금방이라도 동해가 자리를 박차고 나갈까 봐. 두 눈을 꼭 감고 있던 은혁은 조용한 이동해에 살짝 눈을 떴다. 눈앞에서 이동해가 웃으며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혁재야. 나 좋아해? 근데 키스한 거 아니고 뽀뽀한 건데?”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 거 같아. 나 지금 심장이 엄청 빠르게 뛰고 있다고. 아니, 근데 얘는 왜 이렇게 태평한데..? 자기 좋아한다는 소리 들은 거 아니었어? 근데 뭔 반응이 이래? 놀리는 건가?

 

“이동해..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은혁이 손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결국 놀리는 거라는 것밖에 결론이 안 나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놀리는 거 아닌데? 라고 하는 이동해의 말은 믿지 않았다.

 

“이혁재. 혁재야. 혁아. 나 장난치는 거 아니야.”

 

동해는 혁재의 옆에 앉아 머리를 기댔다. 나 너 좋아해.

 

“예전에 너 그렇게 가고 나서 걔랑 얘기했거든? 근데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거 같지 않대. 근데 뭐 틀린 말은 아니었어. 근데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거 같대. 그래서 그 뒤로 걔랑 헤어졌는데 너가 전학 간 거야. 처음엔 많이 섭섭했거든? 근데 너 없어지고 나니까 왠지 하루하루가 재미없더라.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내가 즐거웠던 순간에 항상 너가 옆에 있었어. 그리고 깨달았지. 아, 난 여태 널 좋아하고 있었구나라고. 근데 깨달았는데 너가 없었어. 그리고 너가 아무말도 없이 가서 나한테 화난 게 있는 줄 알았거든. 그래서 고백하기도 전에 차였다는 생각이 들었어.”

 

“무슨..! 아니야. 내가 도망치는 바람에..”

 

“응, 그니까 이제 솔직하게 말해줘.”

 

“좋아해. 그니까 그ⵈ”

 

나도 좋아해하며 동해가 혁재의 귀에 대고 말해줬다. 빨개지는 혁재의 얼굴에 동해는 아까보다 조금 깊은 입맞춤을 했다.

 

 

뜨거운 여름에 만난 아이들은 저마다의 사랑을 품고 어른이 되어 여러 감정이 섞였던 어느 가을에 만났다. 그렇게 운명처럼 다시 만난 둘에게는 따뜻한 봄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 달 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모이게 된 이번 촬영의 컨셉은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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