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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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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이 아팠던 상처도 아물기 마련이고, 미친 듯이 뜨거웠던 물도 언젠가 식기 마련이다. 기후의 변화로 계절이 변화하고, 우리의 감정은. 아니···, 내 감정은 기후에 반비례했다. 정확히는, 했었다. 그럼 네 감정은 계절에 비례했던가? 그래서 우리는 반비례한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가끔가다 문득 그때의 열렬했던 감정 변화를 떠올리며 어떻게 한 사람에게 감정을 그리도 쏟아부을 수 있었는지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이 그런 거니까. 한 때의 뜨거웠던 사랑이니까.

 

 

-

 

 

"이동해."

 

 

왜. 목이 풀리지 않아 목소리가 푹 잠겨있는 게 아직 잠이 덜 깬 듯했다. 나랑 한 약속은 잊고 이 시간까지 태연하게 잠이나 푹 잤다 이거지. 내가 늦으면 별 소리를 다 해대더니. 최근에도 이런 적 있지 않았나.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괜히 입을 꾹 다물었다. 지나가는 차 소리가 새어 들어갔는지, 휴대폰 너머에서 천 스치는 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혁아. 그,"

 

"아니야, 동해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다시 자. 나 집에 갈 거야."

 

 

혁아, 혁재야. 이동해의 목소리가 다소 조급한 듯했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통화 종료 버튼을 꾹 누르니까 1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문자 알림이 연속으로 울렸다. 처음으로 이동해가 늦었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얘도 사람인데 늦을 수도 있고 그런 거지. 근데 세 번째 반복되니 좀... 일부로 그러나 싶기도 하고. 나도 가끔 늦기는 하지만 이렇게 다 까먹고 쿨쿨 자고 있지는 않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핫초콜릿을 타 마셨다. 컵에 남은 뭉친 초콜릿 가루를 입에 털어 넣고 있을 때 즈음 벨이 울렸다. 추울 텐데. 물론 이제 날씨가 풀려가고는 있으나 아직 쌀쌀한 날씨라 그냥 집에 들이는 게 맞나, 싶었지만 괜히 심술이 나서 걸쇠를 걸고 문을 열었다.

 

이동해에 얼굴에 미안함과 당혹감이 덕지덕지 붙어있어 당황스러웠다. 어쩌라고, 이동해. 어쩔 건데. 이동해가 문고리를 잡고 미안하다는 말을 귀에 박았다. 짜증 나게, 진짜. 화를 낼 거면 문을 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얼굴은 드럽게 잘생겨서. 맘 약해지게 만들어···. 물론, 한숨에 달려온 이동해가 나름 미안해 보여서 그런 거다. 진짜로. 그게 제일 큰 이유였다. 진짜.

 

 

 

왜 늦었는데? 알잖아, 요즘 바빠서...

 

누군 안 바쁜 줄 아나. 똑같은 대학생이고 똑같이 알바하고 사는데 지는 바쁘고 나는 안 바쁜가.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올 뻔한 걸 참고 대신 꾹 깨물었다. 질렸니? 나한테 질렸냐구···.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두 손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미안, 안 늦을게."

 

 

화가 풀린 건 아니었으나, 더 짜증을 내기도 뭐해서 입을 닫았다. 강아지 마냥 쳐다보는 게 얄미워서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이동해가 더 징징댈지도 몰라서, 그냥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 배고파."

 

"응, 밥 먹자. 혁아. 너 먹고 싶은 거 먹어."

 

 

안 말해도 그럴 거였어. 그래, 알았어. 이동해가 뭘 해도 참아줄 의향이 있었다. 아직은. 나는 이동해를 너무 좋아하니까···.

 

 

-

 

 

심각하게 원만한 사이는 약간의 지루함을 동반한다. 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동해에게서 온 마지막 연락이 3일 전이었음에도 바쁜가보다, 하고 넘기게 됐다. 토요일이면 만났지만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었고, 사랑한다는 말이 줄었다. 여전히 이동해를 사랑, 했지만···. 가끔 의문이 들었다. 이동해는 나를 사랑하나?

 

의심하기에는 이동해의 눈에서 진심이 묻어나오는 것도 같았지만, 잘 굴러가던 바퀴에 껌이 붙은 듯 잠깐씩 끈적하게 생각이 머물 때가 있었다.

 

 

 

"혁재야, 무슨 생각해."

 

 

응? 무슨 생각하냐고. 별거 아냐. 마지막 대답에 이동해의 시선이 진득하게 머물렀다가 거둬졌다. 표정이 무슨 상처받은 것 마냥···. 동해야, 나 좀 잘게. 응. 급격히 무미건조해진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진짜 서운한가? 근데 지금은 피곤함이 이성을 덮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감은 눈 뒤로 수 많은 생각이 또 다시 안일함으로 점칠되었다.

 

 

-

 

 

후덥지근한 계절이 성큼 다가오자 온 몸이 찝찝했다.

 

하루에 세 번씩 샤워를 해도 시원해질 기미가 없었다. 얼음을 와드득 씹으면 입안은 시원했지만···.

 

 

이동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없던 연락이 갑작스러울 만큼 늘었다. 이건 또 무슨 변덕이야. 더운 날씨 때문에 불쾌 지수가 오른 것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그냥 짜증이 늘어난 건지, 피곤한 건지. 이동해가 하는 말에 집중이 안 됐다.

 

멍하니 이동해가 하는 말을 듣다 혁재야, 하는 목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리고 무슨 말을 했냐고 되물었다. 그럴 때마다 저 너머에서는 한숨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30초도 지나지 않아서 친절한 목소리로 다시 얘기해주고는 했지만, 그마저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귀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이동해가 뭘 해도 설레지 않는다는 것은, 이동해에게 익숙해진 것일까?

 

 

-

 

 

-

 

 

전화를 받자마자 정신이 들어 이불을 치우고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었다. 혁재 목소리에서 서운함이 잔뜩 드러났었다는 걸 전화를 끊고서야 인지했다.

 

이상했다. 내일 당장 혁재랑 약속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밤늦게까지 휴대폰을 붙잡고. 혁재랑 만날 때마다 늦장을 부리다가 결국엔 미안하다 사과를 하게 되고. 혁이가 칭얼거리는 게 더이상 사랑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이런 게, 권태인가?

 

부랴부랴 씻고 전에 입었던 옷을 입고. 그러고 혁재네 집으로 가는 도중에도 혁재를 보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빨리 따듯한 곳에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그리고 이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가장 이상했다. 전이라면 기시감이 들었을 것에 대한 의문이 없다는 것에 기시감이 들었다.

 

사랑이란 감정이 어떤 건지 혁재를 통해 이해한 줄 알았는데, 이게 사랑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 같았다.

 

 

-

 

 

이혁재는 그 길었던 겨우내 보고 싶다는 말을,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었을까.

 

셀 수조차 없었던 그 말들이 날씨가 풀리자 모든 게 마법이었다는 듯 줄었다. 혁재의 연락이 없으니까 대화가 뚝뚝 끊겼다. 간단한 용건들 뿐인 메시지 창을 휙휙 올렸다. 주먹을 세게 그러쥐었던 손의 손바닥에 짙은 손톱자국이 남았다.

 

 

 

-혁재야.

 

-내일 언제 갈까?

 

 

 

예전에는 바로바로 사라지던 카톡의 1 표시가 이제는 1시간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4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한 답장을 확인하고 나서야 두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창밖에 핀 예쁜 벚꽃과는 반대되게도, 입안에는 쓴 맛이 감돌았다.

 

 

-

 

 

혁아, 혁아. 들려?

 

아, 미안. 이혁재의 건조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어 왔다.

 

혁재의 최근 행보에서 예전의 나를 비춰보기란 씁쓸한 것이었다. 이혁재의 노력에 조금이라도 부응했어야 했다. 혁재는 최선을 다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었다는 게 인제 와서야 후회됐다. 그런다고 바뀔 것은 없었지만, 과거에다 대고 소리를 칠 수 있다면 그러고야 싶었다.

 

내가 물으면 유야무야 대답하고 끊기는 대화가 참 웃겼다. 연인이라기보다는, 짝사랑.

 

 

혁재는 그 동안 연애를 하면서도 짝사랑을 했다는 거네. 혁재가 힘들었을 것은 알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삼킬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미치도록 사랑을 갈구하고 표현했던 혁재니까.

 

끈적거리기만 하던 땀이 눅눅하게 마른 티셔츠가 찝찝해서 벗어던지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답답한 감정을, 부디 물줄기가 다 흘려보내주기를 바라며.

 

 

-

 

 

텁텁했던 여름 공기가 자취를 감추고, 선선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밤공기는 카디건을 걸쳐야 할 정도로 쌀쌀해졌다. 이동해는 감정 소모에 지쳤고, 이혁재는 잿더미만 남았다. 1년 남짓한 시간을 견디며 느낀 점은 우리의 사랑은 참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랑할 만 하면 사랑해주지 않았고, 그것에 지치면 그제야 사랑을 나누려 했다. 꾸역꾸역 버텨오던 시간이 너무나도 얇아서, 그다지 길지 않았던 시간임에도 위태로웠다. 누군가가 작은 돌멩이 하나만 던져도 바스러질 지경이었다. 감정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서, 무한히 사랑할 수가 없었다.

 

 

기온 변화가 기후 재난을 불러왔다.

 

 

혁재의 온도와 동해의 온도는 너무나도 달랐다.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 기적이래도 놀랍지 않을 만큼. 어찌 버텼냐 묻는다면 어떻게든 버텼다고. 그리 말해도 좋을 만큼. 마음이라는 기온이 너무 달라서, 관계라는 기후에 악영향이 미쳤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 말은 가끔 틀리는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노력했으나 곧 끝나버릴 듯한 이 관계처럼. 알고 있으나 먼저 말하기를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으니까. 쥐도 새도 모르게 연락이 끊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끝내기에는 너무 진심이었으니까. 이동해도, 이혁재도, 이별을 준비했다.

 

 

 

혁재야. 응. 우리 언제 볼까? ···내일? 그래. 내일이 끝이라는 걸 양 쪽 다 알고 있겠지. 이동해는 저도 모르게 좁혀진 미간을 꾹꾹 눌렀고, 이혁재는 손톱 옆 거스러미를 뜯었다. 이동해에게 이혁재란, 이혁재에게 이동해란. 유토피아였을까, 디스토피아였을까.

 

그도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아니었을까.

 

어떤 것이었어도 이제는 무의미했다.

 

 

 

-

 

 

 

단풍잎이 떨어지는 한산한 길가 끝에 있는 한적한 카페였다. 딸랑 소리를 내며 열린 유리문에는 드문드문 지문이 묻어있었다. 어서 오세요! 하는 활기찬 목소리가 둘을 반겼고, 따듯한 아메리카노와 차가운 아이스 바닐라 라테가 각자의 손에 쥐어졌다. 매일 매일 잡았던 손은 각자의 코트 주머니에 숨어 자취를 감췄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길 끝에서 끝까지 걷는 동안 귀에 들어오는 소리는 지나가는 차의 엔진 소리와, 달려가는 꼬마의 들뜬 환호성. 그리고 이혁재의 손에서 얼음이 찰랑이는 소리. 아메리카노를 한모금 삼킨 이동해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열었다.

 

 

 

"우리, 헤어질까. 혁아."

 

 

 

...응, 그래. 그러자. 잠깐의 정적은 서로에 대한 예의였을지도 모른다. 이혁재의 입에서 나온 긍정에 이동해는 짧은 숨을 뱉었다. 그 누구도 울지 않았고,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시선이 맞닿았을 때는, 수고했다는 한 마디가 오갔을 뿐이었다.

 

 

 

시간은 찰나의 연속이고, 이동해와 이혁재는 서로의 찰나였다.

 

뜨거운 사랑은 결국에 미지근한 추억으로 기억 속 깊숙한 상자에 담겼다. 가끔가다 '혼자' 꺼내 보면 그땐 그랬지, 하게 되는. 그러나 마주친다면 우리 그때 그랬는데. 하면서 웃으며 연애할 시절의 서로를 추억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 식어버린 감정의 온도는 관계의 변화를 가져왔다.

© 2021 HaeEun Collab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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