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됴리
시발 돛대다. 뭐 이렇게 종일 되는 일이 없냐. 동해는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하나 남은 담배를 꺼냈다. 아무리 주머니를 털어보아도 남은 건 이거 하나. 내야 할 관리비, 식비를 손가락으로 계산하니 아득했다. 아, 이번 달은 진짜 끝이겠는데.
복잡했던 일을 뒤로하고, 그 어떤 오해도 풀지 않고 그냥 도망치듯 올라온 서울이었다. 타오르는 분노와 정의감을 묻어둔 채 조금은 식어버린 마음이 되어버린 건 그 자체의 동해였다.
외곽이랑 맞닿은 묘하게 고즈넉한 그런 마을. 상상과는 다른 서울이었달까. 부모님이 처음 만나 동해가 5살이 될 때까지 키운 곳이라던데. 뭐 기억이 날 리가 없으니.
그건 둘째 치더라도 혼자 온 이곳은 외로웠다. 그렇지만 외로워서 좋았다.
"아저씨 여기 담배꽁초 버리면 안 되는데."
"네?"
뜬금없이 머리 위에서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동해는 물고 있던 담배에 불도 못 붙이곤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본 담장 위에는 어린 소년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어제도 분리수거 제대로 안 하던데."
"누구세요?"
"혹시 안 들려요? 지구가 아프다고 울고 있잖아요."
들리겠냐고. 진짜 오늘 재수 옴 붙었다. 소년은 언제부터 동해를 보고 있던 건지 눈을 껌벅이며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제 딴엔 인상을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정말 하나도 위협이 안 되어서 어찌 반응해야 하나 동해는 고민이 되었다. 콱 욕이라도 할까.
"저기요. 왜 대답 안 해요? 지구온난화가 두렵지 않아요?"
"아, 네 죄송합니다. 피고 나서 꽁초는 따로 버릴게요."
그래, 욕을 해서 무엇하나. 동해는 근 몇 년간 배운 게 있었다. 웃는 얼굴로 넘기면 일은 생각보다 커지지 않는다는 것. 피곤해질 일도 발생하지 않고, 마음 쓸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아 근데 불은 또 왜 이렇게 안 붙는 거야. 오늘따라 불이 올라오지 않는 싸구려 라이터가 짜증 났다. 버리든가 해야겠다. 일단 이번만 쓰고. 앞의 소년을 무시하곤 동해는 집중했다.
"그리고 페트병 버릴 때는 라벨 띄고."
익숙한 끈질김에 동해는 다시 한번 웃는 얼굴을 지어냈다. 한숨을 한번 푹하고 쉬긴 했지만.
"근데 뭐 봉사활동 중?"
"아니, 일 중."
봉사활동이라도 하는 학생이겠거니 했는데, 그것도 아니란다. 동해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고 보니 분리수거 잘 안 하는 거 이런 건 또 어떻게 아는 거야. 요즘 뉴스에 스토커가 기승이라고 이야기하던데, 그치 아무래도 내 얼굴이면 가능성이 없진 않지? 아닌가?
본인이 생각해도 과도하게 잘생긴 본인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바로 밑 근육투성이 몸덩이가 동시에 떠오른 동해는 더 이상 상상하기를 멈췄다. 어떤 미친 스토커가 나를 스토킹하겠어. 아냐 근데 내가 좀 이쁘게 생기긴 했잖아.
아, 담배에 불이 안 붙으니까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앉아있네. 라이터는 어디서 또 주워오지.
"그건 그렇고 그쪽 혹시 스토커?"
"히어로."
"히어로?"
"응, 지구를 지키는 히어로예요. 여기가 내 구역이고."
그래, 미친놈이었군. 괜히 고민했네. 동해는 대충 알겠다는 듯 성의 없이 고개를 몇 번 끄덕끄덕하더니 몸을 살짝 구부려 다시 한번 라이터를 탁탁- 켰다.
지나가다 받은 싸구려 라이터와 하나 남아있던 하얗고 긴 담배, 조금은 거친 동해의 손가락은 신기하게도 어울렸다. 천박스러운 라이터의 문구와는 달리 귀한 동해의 코끝이 그러했고 라이터의 촌스러운 형광빛과 집중한 입술의 톡 튀어나온 부분이 그러했다.
아 붙었다. 곧이어 뿜어나오는 매캐한 하얀 연기는 동해의 얼굴을 뒤덮었고 그 연기 안으로 보이는 찌푸린 얼굴이 수려했다. 보통 담배와 함께인 남자는 없어 보여야 정상일 텐데, 동해는 그마저 화보 같았다. 한 쪽 눈을 찡그린 개구진 표정과 새하얀 담배를 물고 있는 붉은 입꼬리.
"저기 히어로."
"네."
"방해되니까 꺼져요."
"그쪽이 꽁초 몰래 버릴 수도 있잖아요."
무릎이 걱정도 안 되는 건지, 젊음이 좋은건지 꽤 높은 담장에서 폴짝-하고 뛰어내린 히어로는 허리에 손까지 얹고 비장한 표정으로 동해의 바로 앞에 섰다.
동해는 히어로를 위아래로 훑었다. 막상 앞에 선 걸 보니 키도 얼추 비슷하고, 하얗고 말랑하게 생기긴 했어도 꼬마는 아니구나 싶었다. 결국 앞에 히어로를 세워두곤 담배를 피운 동해였다. 히어로는 맵지도 않은지 담배 연기를 제 혼자 다 마시고 있었다. 아 진짜 짜증 나네.
동해는 아직 꽤 남은 담배를 대중 벽에 비벼끄곤 담뱃갑에 집어넣었다. 뭐 앞에서 히어로가 눈이 째져라 째려보고 있기도 했고. 담뱃갑에 꽁초가 무사히 들어가는 걸 확인하자 그제야 히어로는 표정을 풀고 웃어 보였다.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이동해."
"오 이쁘다 이름. 아, 근데 요즘 동해 바다에 쓰레기가 떠내려온다는 소리 알아요?"
"알 리가… 아, 내가 왜 대답을."
분명 이 순간이 어이가 없는 건 동해인데, 반대편에 서 있는 히어로가 더 어이없다는 듯 팔자 눈썹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꼭 타박하는 듯한 말투로 동해를 나무랐다. 아니, 여기 아저씨가 어디 있다는 건데. 아, 내가 이름은 왜 말해줘서.
"히어로랑 친구를 맺었으면 그 정도는 이제 좀 알아야죠."
"내가 왜 히어로랑 친구야."
"내 맘이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어이없는 대답에 내가 얘랑 왜 어울려주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든 동해는 히어로를 그냥 지나쳐 걸어갔다. 쓰레기통이 어딨더라 등의 별 어울리지도 않는 상상을 하며. 아니, 애초에 꽁초를 바닥에 버릴 생각도 없었다고.
히어로는 별로 자존심 같은 건 없는 건지 본인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동해한테 손까지 흔들면서 인사했다.
"자기 전에 '지구야 미안해!' 라고 하기!"
아, 장초였는데 그냥 다 필걸. 입이 썼다.
그 이후로 히어로와 더 자주 마주하게 된 동해였다. 동해가 주로 나오는 시간을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종일 나와 있는 건지. 히어로는 생각보다 한가한 직업인가 봐?
이름도 알게 되었다. 이혁재, 답지 않게 22살. 좋아하는 건 환경보호, 그리고 계란이 들어간 불고기버거. 지구를 지키는 히어로답게 늘 마시는 건 텀블러에 담은 콜라. 가끔은 달달한 에이드.
딱히 동해가 먼저 물어봐서 알게 된 것도 아니었다. 맨날 담벼락에 앉아서는 쫄랑쫄랑 다리를 흔들면서 혼자 떠들기도 잘 떠드는 히어로였기에.
"너 그런 거만 먹으면 죽어서도 몸 안 썩어."
"그쪽은 맨날 담배만 피워서 죽기 전에 썩을 것 같은데."
이게 도대체 무슨 대화인건지 스스로도 의문이었지만, 동해의 입은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히어로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햄버거는 맨날 무슨 돈으로 먹냐."
"협회에서 돈이 나와."
히어로 협회 복지 좋네 라는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던 동해는 건조하게 웃으며 히어로를 올려다봤다. 또 자주 봤다고 이젠 머리 자른 것도 알아보겠네. 묘하게 삐뚤어진 히어로의 일자 앞머리가 웃겼다. 분명 마른 웃음이었지만 히어로에게 물든 건지 마음이 젖어가는 착각이 들었다.
"그러면 선량한 시민 담배 좀 하나 사다 줘."
"꺼져."
"히어로가 말이 거치네."
"그쪽한테 배운 건데."
마지막 한입까지 야무지게 먹은 히어로는 손가락에 묻은 소스가 아까웠는지 쪽쪽 빨았다. 어찌나 맛있게 빠는지 동해는 자기도 모르게 그 입술을 멍하게 쳐다봤다. 좀 이상했다. 뭐 동해는 이런 생각을 할 나이였다. 자연스러운 거야.
아무도 뭐라 한 적 없거늘 괜히 혼자 목 뒷덜미에 열이 오를 만큼이나 민망해진 동해는 담장에 앉아있는 히어로의 발을 툭툭 쳤다. 대충 걸쳐있던 신발이 툭 하고 떨어졌다. 아니, 신발을 왜 이렇게 구겨 신는 거지. 하여간 맘에 안 들어.
"다 큰 어른이 손가락을 왜 그렇게 빨아."
"비누를 너무 많이 쓰면 지구가 아파."
"지구가 햄버거 포장지는 안 아프대?"
"아, 역시 내가 친구보는 눈이 있어. 아저씨 좀 똑똑한 것 같아."
저런, 또 도움이 되어버렸다. 동해는 괜히 지끈거리는 듯한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동해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히어로는 내일부턴 냄비에다가 받아와야겠다며 신난 뒤통수로 떨어진 신발을 줍고 있었다. 동해는 괜히 히어로가 얄미워서 그런 히어로를 발로 툭 밀었다.
사람에게 치이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이 모든 게 재미없어졌던 그 시기에 딱 나타난 이 사이비 히어로는 동해에게 조금씩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뭐 막 엄청 영향력 있는 일상은 아니고, 그냥 담배 메이트 정도. 그렇다고 하자.
나름 지구 히어로니까 동해도 환경보호 포스터 그런 거라도 보는 날엔 한두 마디씩 전해주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도움이 되었다며 친구가 좋다고 웃는 히어로 표정이 웃겨서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 생각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찝찝한 것도 안 남는 그런 존재라서 좋았다. 당장 사라져도 아쉽지 않을 뭐 그런 사이.
"그러고 보니 꽁초 아저씨 왜 평일 내내 왜 안 보였어."
"개학해서 바빴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더라고. 어쩌다 보니 이번 주 평일 내내 히어로와 마주치지 못한 동해였다. 별로 신경 안 쓸 줄 알았는데, 얘 나 기다렸나?
"아 학교 다녀?"
"히어로는 학교 안 가냐."
"웅 학교 애들은 평범한 인간이라서 그런지 나 같은 히어로랑 학교 다니는 걸 부담스러워하더라고."
아무렇지 않게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 입술 사이로 쪼롭- 빨려 들어가는 음료가 갑자기 궁금해진 동해는 자연스럽게 혁재의 손에 들린 텀블러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 빨대 그대로 쪽쪽 빨았다. 녹은 얼음이랑 섞인 콜라가 생각보다 밍밍했지만, 맛이 못 먹을 정도로 나쁘진 않았다.
"그래, 뭐 히어로가 굳이 학교 다닐 필요는 없지. 그래도 나중에 검정고시라도 봐. 아 그리고 앞으로는 8시쯤 골목 지나갈 것 같은데?"
동해는 본인도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 않는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는 충고질과 자기도 모르게 은근슬쩍 흘린 일정. 이런 스스로가 꽤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근데 대학생이라고 그러지 않았나. 뭐 알 게 뭐야.
그 이후로 히어로는 알람이라도 맞춰놓은 건지 딱 동해가 지나가는 시간에 담장 위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동해는 가끔 일정이 일찍 끝나서 평소보다 담장 앞을 일찍 지나가게 되는 날엔 괜히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히어로와 마주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고 보니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이번 주 내내 히어로가 안 보였다. 뭐 약속을 했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괜히 담벼락마다 돌아서 집에 들어가는 동해였다. 다른 구역이라도 지키러 갔나. 의리없는 히어로.
동해는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근처 담벼락마다 기웃대며 담배를 피워댔다. 그러다 보니 담배 한 갑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온 동네를 다 돌아도 히어로와 마주치지 못한 동해는 포기한 듯 동네의 터줏대감과도 같은 작은 슈퍼에 들어갔다. 들어가니 꼭 친척 어른처럼 동해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사장님이 있었다.
"동해 오랜만이네?"
"아… 안녕하세요. 저 이거… 빵이랑 던힐 한, 아 알았어요. 빵만 계산해주세요."
슈퍼사장님의 째림에 꼬리를 내린 동해는 계산한 빵 두 개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불필요한 논쟁은 이제는 질색이었다. 그렇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순간 또 다른 아주머니가 신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하루에 몇 번씩은 있는 수다 타임이겠지. 크고 작은 주택이 즐비한 이 동네는 주민들끼리의 유대가 참 두터웠다.
"콩만 한 게 아주 담배 냄새가 진동을 한다 진동을."
들어온 아주머니는 괜히 동해의 등을 퍽하고 쳤다. 담배 좀 작작 피우라는 의미겠지. 언제 봤다고 이렇게나 구는지. 알다가도 모를 동네. 다들 동해를 고깝게 보는 것 같으면서도 다정하게 굴었다.
"맞다. 감나무 댁. 요즘 파란 지붕 집 도련님이 통 안 보이더라?"
"여기서 먹고 가도 되죠?"
파란 지붕 집이면 동네에 하나였다. 동네에서 가장 큰 집, 히어로가 맨날 앉아있는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는 집. 혹시 히어로 이야기인가 싶어서 동해는 괜히 어설프게 그 자리에 서서 빵 봉투를 찢었다. 궁금해서 그런 게 아니고, 그냥 배가 고파서야.
"뭐 병원이라도 간 거 아니겠어?"
"병원? 또 심해진 거야?"
"아니 뭐 그거 말고는 그지? 정신 아픈 게 뭐 쉽게 낫나… 어째 저번보다도 더 멍한 것이"
"하긴 다들 어릴 때부터 봤으니 안쓰러워서 뭐라 하지도 못하잖아요."
"모난 곳은 없는데 말이야."
뭐야 별 도움도 안 되는 소리였네. 동해는 먹던 빵을 대충 한입에 욱여넣고는 냉장고에서 계산도 안 한 두유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꼭 히어로가 음료수를 먹던 모습처럼 쪼롭-하고 빨았다. 물론 동해도 본인이 지금 못된 짓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사장님 이건 서비스."
"저놈의 새끼를 그냥."
"아이고오 냅둬. 냅둬 요즘 애들이 다 그렇지."
"담배 좀 그만 피우고, 조금 있다 와서 반찬 좀 가져가!"
사실 동해를 고깝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어린 아이에게 우리가 모를 또다른 무슨 일이 있었겠지, 그저 걱정이었다.
빠르게 걸어가던 동해의 뒤통수에도 그 외침이 전해졌다. 의도와는 달리 여전히 따뜻한 주민들이라서 마음이 아팠다. 정말이지 정 붙이기 싫은 사람들이었다.
빵을 억지로 욱여넣었더니 소화가 안된 건지 가슴이 갑갑했다. 동해는 죄 없는 본인의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리고는 다시 골목길 사이로 들어갔다. 히어로는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지구는 안 지키고 뭐 하는데.
"뭐야 너."
며칠 뒤, 아무렇지 않게 담장에 앉아있는 히어로였다. 간만에 본 히어로는 얼굴에 커다란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얼굴이 어찌나 쪼끄마한지 밴드 하나가 뺨 한쪽을 다 덮을 정도였다.
"자빠졌어 고양이 구하다가."
히어로의 등 뒤에서 야옹-하고 우는 삼색 고양이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듯 자그마한 코끝이 촉촉한 분홍색이었다.
"이름은 동글이야."
"누가 봐도 세모인데 쟨."
"그쪽 마음이 모나서 그래."
앞에 있는 동해는 본 척도 안 하고 히어로에게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리더니 담장 안쪽으로 쏠랑 들어가 버리는 동글이의 뒷모습이 꽤나 깜찍했다. 그건 그렇고 보자마자 극딜이라니, 이 사이비 히어로가?
"걱정해줬더니 이게."
"걱정했어?"
"아니?"
"그럼 아저씨도 나 불쌍하다고 생각했어?"
"뭔 개소리야. 맞다 이거 빨대."
그때 뺏어 먹었던 텀블러와 실리콘 빨대였다. 어찌나 설거지가 힘든지 버려 버릴까 라는 충동에도 꾹 참고는 정성껏 말리기까지 한. 한동안 히어로가 안 보여서 가방 속에서만 계속 있었던.
"신기하네. 보통 나한테 불쌍한 애기라고 하던데."
"애기라고 하기에는 좀 양심 없지 않냐."
"나 귀엽잖아?"
"침 뱉어도 돼?"
"그렇다고 개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뱉으라고?"
히어로는 대답 없이 고개만 갸웃했다. 본인에게 이렇게까지 막말을 하는 사람은 동해가 처음이어서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헷갈렸다.
"나한테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그쪽이 처음이야."
"방금 삼류 드라마 대사 같았어."
"아니 뭐 그냥 싫지 않다고."
"방금은 삼류 영화 대사 같았고."
"아 꺼져."
동해에게서 배웠다는 '꺼져'를 아주 시기적절하게 써대는 통에 동해는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골목길이 떠나가라 웃었다. 솔직히 그렇게 웃긴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잔뜩 삐진듯한 통통한 입술이 너무 귀여워서. 그래서 웃음이 났다. 웃음이 걸린 입꼬리가 오늘따라 촉촉해 보였다. 그리고 그 입꼬리에선 평소처럼 별 의미없는 질문이 쏟아졌다.
"근데 그쪽 히어로라며. 쫄쫄이 안 입냐?"
"무슨 고조선 때 이야기를 하고 있어 요즘 히어로는 시민에게 스며드는 게 컨셉이야 하긴 평범한 인간이 뭘 알겠어."
"고조선 때부터 히어로였어?"
생각보다 동해는 편견이 없는 편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히어로라고도 불러주지.
"아니 그땐 세포도 아니었을 텐데."
"확실히 멍청이는 아닌데."
"멍청이는 아니지 히어로니까."
왜 매일 이렇게 영양가 없는 대화만 나누게 되는 걸까. 근데 왜 이런 대화가 재밌는 걸까. 그건 히어로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지 이쁘게도 웃고 있었다. 마음이 이상했다.
"근데 아저씨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뭔데."
"변태야 혹시?"
"돌았니?"
"아니 대낮부터 교복 코스튬은 좀 그렇지 않아?"
동해의 복장을 보고 말하는 것이었다. 진지한 눈매가 제법 웃겼는데, 안타깝게도 동해는 변태가 아니었다. 그냥 선량하고 싸가지없는 고등학생일 뿐. 뭐 사실 그렇잖아. 학생이냐고 물어본 적도 없고? 아마 그동안은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옷을 갈아입고 오거나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몰랐던 듯싶었다.
동해가 대답 대신 교복 명찰에 쓰여 있는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몇 번 고개를 갸웃하던 히어로는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속아서 짜증이 난다거나 이런 눈치는 아니었고, 아 그랬군 정도랄까. 히어로도 동해 못지않게 덤덤한 구석이 있었다.
"내가 형이네."
"나이 물어본 적 없으니까."
"뭐 상관없어. 그래도 아저씨 해."
"계산이 좀 특이한 편이네. 그쪽 우주에선 그래?"
"미안한데 난 지구에서 태어난 히어로야."
한마디를 안 지네. 한마디를 안 져. 사실 둘이 나이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건 없었다. 동해는 혁재에게 야야- 거렸고 혁재는 동해를 아저씨라 불렀다. 아 딱 한 가지, 동해는 그때부터 속으로 히어로라고 부르기를 그만뒀고, 혁재라는 이름을 새겼다.
그리고 자존심을 거두고 인정했다. 혁재가 눈에 안 보면 궁금할 것 같고, 걱정이 될 것 같았다. 갑자기 사라지면 화가 날 것 같았고, 본인을 배신하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익숙해져 버린 이 동네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이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외로워지고 싶었는데 이젠 뜻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동해는 혁재의 하루가 궁금했고, 알고 싶은 것들이 점점 많아졌다. 꼭 이상한 마음이었다. 왜 그럴까 생각해봐도 별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저씨 근데 교복 잘 어울린다."
"히어로도 입든가."
"난 아저씨처럼 변태가 아니야."
"미안하지만 진짜 학생이야."
또 한동안 혁재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또 뭘 구하다가 다쳤는지, 날이 쌀쌀한데 감기에라도 걸린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그 병원에 간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은 왜 핸드폰 번호를 물어볼 생각을 왜 안 했을까였다.
결국 참고 참던 동해는 파란 지붕 집 대문 앞으로 갔다. 그리고 벨을 눌렀다. 그날 이후로 무엇을 해도 무덤덤하던 동해의 심장이 이렇게까지 뛰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가까운데, 진작 와 볼걸. 후회와 설렘이 공존하는 이상한 마음이었다.
벨을 누르고 잠깐의 정적 후, 끼익-하고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안에 들어가 마당을 따라 걸으니 잠옷을 입은 혁재가 놀란 표정으로 나와 있었다. 꼭 지랑 어울리는, 지구가 잔뜩 그려진 하늘색 잠옷. 놀란 토끼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친구가 놀러 온 건 처음이라, 어… 들어올래?"
따라 들어간 집은 컸고, 추웠다. 아무도 없는 건지 적막이 가득했다. 충동적으로 오긴 했는데 막상 들어오니 동해는 괜히 민망해 볼만 긁적이고 있었다. 뜨겁게 열이 오른 뒷목이 어색했다. 혁재는 부엌으로 추정되는 곳에 들어가 우유를 두 잔 따라오더니 동해에게 건넸다. 고양이가 그려진 플라스틱 컵은 혁재와 잘 어울렸다.
그렇지만 정적이었다. 쫑알거려야 할 혁재도 오늘따라 말이 없었다. 마주 앉은 둘은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바닥만 보고 있었다. 오죽하면 동글이가 혁재의 다리에 머리를 부딪치며 뭐라도 말해보라고 재촉할 정도였으니까. 물론 이건 혁재의 상상. 혁재는 슬쩍슬쩍 동해를 보면서 눈치를 보더니,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곤 입을 열었다.
"…나 이번에 책 냈다?"
"뭐야 글 써?"
"아니 그냥 동화…가끔 써…"
"…대단하네. 뭐… 그래서 바빴던 거야…?"
"아니 뭐 그냥 생각할 게 많아서…."
답지않은 둘의 조심스러운 대화 끝은 또 정적이었다. 뭘 탄 건지 고양이 컵 속의 우유는 그냥 흰 우유일 뿐인데 달았다. 그렇지만 입안에서 도는 그 단맛이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꼭 술이라도 탄 듯, 차갑게 식어있던 동해의 몸에 열이 돌았다.
"…저기, 히어로."
"으,응?"
"보고 싶었어. 앞으론 나올 때 연락해."
이렇게 쉬운 걸 왜 그동안 안 했을까. 그 다음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동해는 놀란 얼굴로 가만히 있는 혁재의 핸드폰을 들어 본인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혁재는 그냥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 그렇게 동해의 핸드폰에는 '히어로' 라는 이름으로 번호가 하나 저장되었다. 혁재의 핸드폰에는 딱딱한 '이동해'라는 정직한 저장명의 번호가.
핸드폰 번호를 저장하고 우유까지 다 마신 동해는 이제 가봐야겠다며 일어났다. 아쉬웠지만, 이제 연락할 수 있으니까 뭐. 꼭 퀘스트를 해결한 게임 캐릭터마냥 홀가분해진 마음이었다.
동해를 따라 우당탕 일어난 혁재는 어디론가 급하게 들어갔다 나오더니 작은 연두색 봉투를 들고나왔다. 그리고는 동해에게 건넸다. 안에는 책이 한 권 들어있었다. 그리 두껍진 않았다.
"고민하다가… 주고 싶어져서…."
"감상문 제출해야 해?"
"그런 건 리뷰페이지에 부탁해."
"히어로가 생각보다 세속적이네."
"읽어봐. 읽고 나서… 아, 아니다."
"연락할게. 춥다 나오지 마."
동해는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봉투 안에서 동화책을 꺼냈다. 사이비 히어로 주제에 동화책 작가라니, 내 생각보다 더 멋진 사람이네. 왜 본인이 뿌듯한 마음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혁재가 건넨, 색연필로 그린듯한 삽화가 표지인 동화책의 제목은 「내 마음엔 온도가 없어요」 였다. 묘한 느낌을 주는 제목이었다. 동해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동화책을 펼쳤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동화의 첫 페이지에는 파스텔 속 세상에서 혼자 흑백인 주인공이 서 있었다. 그가 우연히 마주한 바다. 투명한 색의 바다는 주인공을 불렀고 그를 물들였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주인공은 점점 물들어가고 있었다. 매일 찾아가는 바다에 담근 발은 하얀빛, 바다의 반짝이게 비추는 빛을 보던 눈동자는 푸른빛, 일렁이는 파도를 느끼던 몸은 분홍빛이었다. 그리고 그런 주인공을 거울과 같이 보여주는 바다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꼭 혁재를 닮은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이상했다. 동화 속의 바다의 목소리가 본인의 목소리로 들리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 좋아졌던 기분이 다시 나빠졌다. 아니 나빠진 게 아니고 이상해졌다. 울렁거리고 뜨거웠다.
동해는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아직 아무런 연락도 해본 적 없는 그 번호, 혁재의 번호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이번엔 큰 고민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상한 이 마음을 혁재가 해결해주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기대감.
신호음이 끊길 때쯤, 혁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해가 어떠한 말도 하기 전에 혁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냥 듣기만 해.
사실 내 세계에는 온도도 없고 계절도 없거든? 그래서 난 겨울에도 춥지 않고 여름에도 덥지 않아. 근데 당신을 보면 심장이 막 뜨거워. 손끝이 저릿하고 심장도 막 쿵쿵거려서 너무 아파. 근데 또 막 달리고 싶을 정도로 다리는 자꾸 흔들려. 그 와중에 숨은 제대로 쉬어진다?
그래서… 그냥… 그게… 그니까 너무 이상해서 쓴 동화야. 그러니까 내 말은… 나 너무 덥고 차갑고 아프고 힘든데, 그쪽 뭐 하는 사람이야?』
같은 증상이었다. 분명하게 같은 마음이었다. 동해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꼭 예전의 동해처럼, 그때처럼 웃음이 나왔다.
그런 동해의 표정을 알 리가 없는 혁재는 초조하게 동해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듣기만 하라고 한 건 본인이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걸 표현하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듣기만 하라니까.』
"너 나 좋아하나 보다."
그렇게 전화가 뚝 하고 끊겼다. 동해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하나 꺼내더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담벼락을 향해서 걸었다. 아마 곧 나올 히어로, 혁재를 기다리며.
동해도 그동안 마음을 답답하게 했던 문제의 답을 드디어 찾은 것 같았다.
나도 좋아하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