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료의 카운트 다운
연(煙)
저물어가는 세상의 종말이었다. 주먹만한 얼음덩이가 지상에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희뿌연 구름이 까마득하게 덮인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모양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새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몇 분 있다 사라진 걸 보면 잘 도망갔거나, 죽었겠지. 쉼 없이 반복되는 상황에서도 이혁재는 담담하게 키보드를 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오늘 잔업 처리 담당을 맡았다.
"지금 일을 하는 사람이 어딨나 했더니~ 흠흐흠, 여기 있네."
일에 지쳐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반쯤 자포자기하듯 흘러나왔다. 딸깍이던 마우스를 내려둔 혁재가 바로 옆에 놓인 테이크 아웃 컵을 쥐었다. 잘근잘근 껌마냥 씹어댄 녹색 빨대가 자그만한 구멍 사이로 초라하게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내부를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 끝을 입술로 물은 혁재는 빨자마자 깨달음을 얻었다.
다 마셨다. 세상이 잠시 멀쩡하던 점심시간에 사왔던 아이스 바닐라 라떼였다. 달달하게 혀를 현혹시키고 에너지를 공급해줄 수혈팩이 동나버렸다. 얼음도 다 녹아 바람 빠진 소리만 나는 빨대와 플라스틱 컵을 흔들던 혁재가 이내 미련을 놓았다. 회사 탕비실에서는 이 맛을 구현할 수 없겠지. 우울해진 혁재가 고개를 꺾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한계까지 뒤로 밀린 의자에서 끼익 소리가 났다. 끼익, 끼이익. 주인이 몇 차례나 바뀌는 동안에도 꼿꼿이 이 자리를 차지한 사무실 터줏대감인 의자는 늙어서 떠밀린 무게에 비명 소리를 냈다. 혁재는 그 소리를 멍하니 흘려들으며 생각했다. 어느 누군 멸망의 끝자락에 사과나무를 심는다던데, 나는 사무실에 앉아 창백한 스크린 속의 보잘 것 없는 활자를 가다듬고 있구나.
천천히 느릿하게 망해가던 지구가 뚜렷한 끝을 고했던 때가 언제였을까. 한두 달 전이었던가. 이상 기후 변화가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다. 눈보라와 비가 함께 휘몰아치고, 화산이 폭발하고, 급격히 녹은 빙하로 인해 상승한 해수면이 자잘한 수 백 개의 섬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자그마치 두 달이다. 인간은 태어나길 적응의 동물이랬다. 대충 재해가 오는 주기를 파악하고, 조악한 대처 방법을 찾아내자 인간들은 본래의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길 갈구했다. 저 높은 사람들이 화성으로 이주한다던가 우주선의 이름이 노아의 방주라던가 하는 찌라시는 입에 물린 다과처럼 우스갯소리로 넘겼고, 혁재와 같은 일반적인 사람들은 비현실적인 일상으로 복귀해 하루하루를 반복했다.
즉, 한마디로 말하자면 직장에 다녔다. 우습다는 생각은 했다. 고작 그 종이쪼가리가 뭐라고. 어차피 세상이 망하면 쓰지도 못할 텐데. 하지만 그렇게 괄시하기엔 당장 수중에 돈이 없었다. 내일 아침 뻗대고 나가지 않다가는 점심에 집에 꿍쳐둔 라면이나 궁상맞게 반절 쪼개 끓여먹어야 될 터였다. 그리고 저녁에는 나머지 반절을. 다음날은 마른입에 손만 넣고 쪽쪽 빨며 입맛만 다시지 않을까. 뼈 빠지게 다닌 직장의 월급을 꼬박꼬박 바쳐도 고등학교 때 부모님에게서 받은 빚은 여전히 탕감하지 못했다. 삶은 언제나 돈과 연결됐다. 월세, 수도세, 전기세, 통신비를 제외하고 딱 입에 풀칠할 생활비만 남겨놓고 1원까지 탈탈 털어 송금해도 다음날 어김없이 찾아온 초인종과 윽박지름에 진저리쳐야만 했다. 야 이새끼야, 나와! 이것도 돈이랍시고….
채무자에게 무슨 자유가 있겠는가. 그나마 몸뚱이 하나는 건사하니 장판에서 엉덩이를 떼고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할 뿐이었다. 새벽 첫 차를 노리고 달음박질 쳐 사무실에 도망쳤다가, 느지막하게 밤에 돌아가면 만날 확률도 줄어들었다. 세상에 사람보다 무섭고 징글징글한 건 없더라.
띵! 카톡 알림이 울렸다. 상념에서 현실로 돌아온 혁재가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전부터 갈아달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약이 거의 다 달은 형광등이 죽어가는 초파리처럼 흐릿하게 꺼졌다가 켜지길 반복했다. 깜박거리는 빛 아래 구식 핸드폰이 보였다. 투박한 소통창구를 든 혁재가 액정의 알림을 확인했다.
- [이동핵] 어디야 ?
소꿉친구였다. 동시에 몇 달 전에 헤어진 애인이기도 했다. 세상이 망하는데 사랑 놀음을 할 시간이 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곧 누가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애인이란 이름은 예상보다도 더 큰 존재감을 과시했다. 어제 마른하늘에서 내린 벼락에 맞아 타죽었을지도 모르고, 오늘 우박에 머리를 맞아 출혈로 죽었을지도 몰랐다. 심심찮게 나오는 시체들은 국가가 비상사태가 해결되기 전까지 권한을 위임한 국가 산하 조직에서 신원 조회를 마친 후 사이트로 계속 알려주곤 했지만, 그 많은 데이터들 사이에 있을지 모르는 애인 때문에 발을 동동 굴리는 건 사양이었다. 어떤 발버둥을 쳐도 결국 죽음으로 귀결되는 세상에서 사랑이란 사치였다.
- 사무실인데. 왱?
핸드폰 보안을 연 뒤, 간단히 답장을 적어 보냈다. 책상에 내려놓고 나니 갑작스러운 현실감이 들이닥쳤다. 이제 일해야지. 적어도 회사에서 죽는 것보단 퇴근하고 집에서 죽는 게 덜 불쌍하지 않을까. 딸깍 딸깍. 마우스 소리가 다시 적막한 공기를 메웠다. 띵! 알림이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 [이동핵] 갈게
어딜? 사무실을?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췄다. 활자를 뚫어져라 보던 혁재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니가 뭘 알고 여길 와. 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어련히 잘 알겠다 싶었다. 그야, 이동해는 재해 구조원으로 활동 중이었으니까.
'조심히 와' 라고 말하면 낯간지럽나. 동해와는 어릴 적부터 계속 친구로 함께했고 커서 자연스럽게 연인이 됐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친구와 연인의 선을 구분 짓는 게 어려웠다. 고민하던 혁재는 결국 답장 없이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뒀다. 온다고 했으니 알아서 오겠지 뭐. …그 전에 빨리 일 끝내둬야겠다.
이동해가 온 것은 그 뒤로 30분이 지난 후였다. 회사 건물 1층에 위치한 치킨 집에서 갓 튀긴 후라이드 한 마리와 손목에 매달린 까만 봉지 속 맥주 두 캔을 사가지고 말이다. 혁재는 술도 못 마시는 동해가 회사까지 치맥을 사들고 온 것에 잠시 얼척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옆자리 동료 의자를 끌어다 제 옆에 두어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휴게실로 가자. 동해가 말하며 자연스럽게 휴게실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버팅길 생각은 없었다. 언제나 맛있는 걸 사온 사람이 갑인 법이다. 순순히 핸드폰만 집어 주머니에 넣은 혁재가 그를 따라갔다.
"근데 왜 하필 맥주야?"
솟아오른 의문을 참진 못했지만.
나란히 휴게실에 앉아서 치킨 상자를 깠다. 두꺼운 종이 박스가 튀김 기름으로 적셔져 있었다. 군데군데 투명해진 기름종이를 펼치자 황금색으로 노릇해진 닭튀김들이 큼직하게 놓여있었다. 치이익-, 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맥주 캔이 따졌다. 목 뒤로 시원하게 넘긴 혁재가 군침이 솔솔 도는 치킨을 들어 뜯어먹었다. 알맞게 튀겨 튀김옷이 번지르르하게 감싸진 야들한 살이 절로 한 입 더 땡기게 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동해도 한 조각을 들어 야무지게 뜯고 있었다. 우물거리며 치킨을 먹던 혁재가 툭 말을 던졌다.
"야, 그래서 여긴 왜 온거야."
"너 보러 왔지. 그것 말고 더 있냐?"
아니, 누가 그 당연한 걸 묻겠어. 혁재의 입술이 삐쭉 튀어나왔다. 맘에 들지 않을 때 나타나는 버릇에 흘긋 바라본 동해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치킨을 만지지 않은 손으로 입술을 톡 건들이니 안쪽으로 말아 물었던 혁재가 고개를 뒤로 물리며 입을 떼어냈다.
"너 바쁘잖아. 근데 왜 여기까지 굳이 찾아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
동해는 말없이 묵묵히 입 안에 있는 음식을 씹어 삼켰다. 그러곤 도리어 혁재에게 투덜거리듯 말했다.
"우리가 이유가 필요한 사이야?"
응. 필요한 사이야. 이유가 없이 보고 싶다면 이상하잖아. 혁재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직접 입 밖으로 말할 만큼 매정하지 못했다. 동해가 입을 다물고 먹는 혁재를 귀엽다 듯 보았다. 그 시선이 와 닿는 뺨이 간질거렸다. 동해가 자신에게 보이는 관심과 눈빛이 일반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혁재가 가장 잘 알았다. 다만 이를 언어로 형상화해서 내뱉는 순간 둘의 관계가 어떻게든 달라질 테니 침묵하는 것뿐이었다.
치킨이 반쯤 비워질 동안 동해의 일방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요즘 일을 하며 어떤 상황을 봤다거나, 어떻게 해결 됐다거나, 그로 인해서 느낀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혁재는 가만 귀를 기울이다가 적당히 반응을 해주었다. 동해가 하나의 이야기를 마친 후,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혁재가 볼 때 쥐똥같이 조금 마신 정도였다.
"혁아, 그거 알아?"
"뭐."
"내일 새벽에 지구가 멸망할거야."
그래도 이동해는 한 모금에 취해 골로 간 모양이었다. 말하는 꼴이 딱 그랬다. 혁재가 동해에게서 맥주를 뺏어들었다.
"야, 그만 먹어. 너 취했다."
"진짜야."
"진짜는 무슨 진짜. 취한 게 진짜겠지."
"아, 진짜라고!"
혁재는 귓등으로도 안 들으며 이미 다 마신 제 맥주캔을 옆으로 밀어두고, 빼앗은 동해의 맥주캔을 기울였다. 동해 입술이 닿은 곳에 맞닿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서로 볼 장 다 본 사이에 간접 키스로 부끄러워할 나이는 진작 지난 지 오래였다. 동해는 소리 높인 게 언제냐는 듯 혁재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보기 좋은 얇은 입술이 벌어졌다.
"마지막은 너랑 있고 싶어서 온 거야."
"…치킨이랑 맥주캔 사들고?"
"치킨이랑 맥주캔 사들고."
말을 되풀이 한 동해가 낮게 웃었다. 혁재는 쓸데없는 말을 이어서 받아 외는 이 상황이 하나의 촌극 같았으나, 말없이 캔을 더 기울였다. 겉에 맺힌 물방울이 입구 쪽으로 또르르 굴러내려 손가락을 적셨다. 이동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특히 이혁재에게는. 재해 구조원으로서 현장에서 움직이는 만큼 들어오는 정보도 훨씬 많았겠지. 찌라시든 뭐든 내일 새벽 종말한다는 말을 듣고 저를 찾아온 거다. 그 사실이 괜히 기분을 묘하게 했다. 혁재는 맥주를 내리고, 차가워진 손으로 머쓱하게 달아오른 제 귓바퀴를 매만졌다.
"야, 마지막이라면서 회사에서 고작 치킨은 그렇지 않냐?"
"치킨이 어때서. 맛있잖아."
"무드가 없잖아, 무드가."
괜히 틱틱대는 혁재를 가볍게 넘긴 동해가 치킨을 뜯다말고 멈췄다. 왜? 혁재가 묻자, 동해는 그럼 무드를 만들면 되지. 라고 쌩뚱맞게 말했다.
툭. 투둑. 쏴아아아. 둘 사이를 가르고 빗소리가 강렬하게 내리꽂혔다. 휴게실에 나있는 작은 창문 덕에 바로 옆에서 내리는 것 마냥 느껴졌다. 치킨 먹고 나서 같이 영화보자. 동해가 눈을 접으며 순하게 웃었다. 꼭 강아지같은 그 웃음에 혁재는 언제나 약했다.
방치되어있던 컴퓨터에 열려있던 파일을 저장한 뒤 다 껐다. 대신 인터넷 창이 켜졌다. 영화를 볼 수 있는 유료 플랫폼을 들어가 로그인하는 손길이 능숙했다. 아까 가까이 옮겨뒀던 동료 의자는 돌고 돌아 이동해 차지가 됐다. 얼음덩이가 떨어지고 나서 방금까지 따뜻했던 기온은 폭우로 인해 도로 낮아졌다. 온도가 급격히 변화하는 건 익숙했다. 이미 대비책이 되어있는 회사 안에서 알아서 긴 담요를 찾아온 동해가 혁재 어깨에 덮어주었다. 혁재는 그에 대한 별 말없이 스크롤을 내리면서 물었다.
"뭐 볼래?"
"그냥 아무거나."
마지막에 볼 영화를 골똘히 고민하는 혁재를 동해가 허리를 숙인 채 바라보았다. 혁재는 좋아했던 영화를 다시 보는 걸 선호했고, 동해는 새로운 영화를 보는 걸 선호했다. 그러나 지금 어차피 마지막인 만큼 보던 걸 보든, 새 걸 보든 그건 동해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러니 혁재에게 맡겼다. 심각하게 고민하던 혁재가 결국 마우스를 딸깍였다. 어바웃 타임이었다.
"……."
동해가 혁재의 어깨에 기댔다. 혁재는 영화 시작 화면에 집중하다가 갑자기 깨달은 것처럼 몸을 뒤척였다. 슬쩍 고개를 떼 주자 어깨에 덮인 담요를 펼쳐 동해도 감싸주었다. 두 성인 남자를 덮기엔 짧은 턱에 누구 하나 온전히 담요에 둘러쌓이진 않았으나, 서로 닿은 체온이 따뜻해 신경 쓰이지 않았다. 동해가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말없이 영화 감상이 천천히 지나갔다. 화면이 바뀔 때마다 다채롭게 변화하는 빛무리가 둘의 얼굴을 물들였다. 팝콘이랑 콜라 있으면 딱인데. 혁재가 흘러가듯이 말했고, 동해가 사올까? 물었다. 고개를 저은 혁재만 아니었다면 근처 편의점에 다녀왔을 터였다. 둘은 고요히 영화를 보았다. 세상의 종말이라면서, 고작 회사의 작은 컴퓨터에 의존해 영화 보는 게 이상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누구 하나 문제점을 제기하지 않았다. 어바웃 타임이 끝나고, 동해가 선정한 영화가 틀어졌다. 번갈아가며 골라낸 영화 시사회가 쭉 이어졌다.
"동해야."
"왜?"
"…와줘서 고마워."
사실 영화가 정말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냥 둘이 한 공간에 있고, 같은 걸 본다는 게 중요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저마다 생각이 다른 법이었다.
누군가는 죽기 전에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분노를 하며 지금껏 억눌러왔던 폭력성을 내보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근사한 야경과 함께 와인 잔을 기울일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살기 위해 악착같이 타 행성 여행에 몸을 실을 수도 있을 테고, 어떤 사람은... 그저 맥주 두 캔과 치킨, 그리고 영화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너 혼자 죽게 두지 않겠다고."
동해가 웃으며 말했다. 재해 구조원으로 전향해 현장에 뛰어들 때 혁재에게 했던 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에 두려움을 느낀 혁재가 헤어지자고 얘기한 시발점이기도 했다. 이혁재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고, 당연하다고 생각한 걸 놓쳤을 때의 공허함을 이미 충분히 알았다. 죽을 때까지 약속한 이동해가… 늘 약속을 지켰던 이동해가, 만약 그걸 지키지 않고 미리 죽어버린다면 원망할 것 같았다. 왜 나를 납두고 죽었냐고 울어버릴 것 같았다.
죽은 사람에게까지 그러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혁재는 그런 못난 사람이 되기 싫었다. 연인이 아니라 친구 사이에서의 약속은 어길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합리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는 사랑은 사치라는 변명을 들먹이며 도피했다. 그러나 동해는 혁재에게 보란듯이 재해 구조원으로 활약했고, 언제나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으며, 죽음의 끝에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아왔다.
혁재는 동해의 어깨에 조용히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영화 소음이 귀 너머에서 윙윙 맴돌았다. 잠시 멈칫거린 동해가 담요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혁재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현장에서 돌아다니며 생긴 흉터와 굳은살이 있는 마디마디가 도드라진 손이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천천히 내렸다. 매끄러운 이마에 입술이 맞닿았다.
어째서인지 그 온기가 영원히 남아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