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erle
쵸리
흐아암, 캐리어를 질질 끌며 공항을 나오는 혁재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오전 11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댓바람부터 준비한 탓에 오전인데도 이미 피로가 온 몸을 꽉꽉 채웠다. 건너편의 큰 JEJU를 바라보며 햇빛에 눈을 잔뜩 찡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던 혁재의 앞으로 큰 봉고차 한 대가 섰다. 조수석의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더니 익숙한 얼굴, 저와 똑 닮은 얼굴의 여자가 앉아있다.
“트렁크나 열어.”
저를 보며 씩 웃는 얼굴에 심드렁하게 먼저 말을 꺼낸 혁재가 덜컹, 거리며 트렁크가 열리는 소리가 나자 바로 차 뒤로 간다. 허벅지께쯤 오는 큰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었다. 끄응,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난다. 힘겹게 짐을 넣고 트렁크를 닫은 혁재가 쨍쨍한 햇빛을 피해 봉고차 안으로 쏙 들어왔다.
윙윙 돌아가는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이 제일 반가웠다. 지하철에서부터 하도 앉아있어서 네모난 엉덩이를 대충 폭신 딱딱한 차량 의자에 앉히니 어흐, 하고 절로 곡소리가 난다. 앞에 있던 여자가 혁재를 향해 뒤로 몸을 쐐액 돌렸다. 방실방실 웃는 꼴이 뭇내 짜증이 난다. 아마 그 옆의 운전석에 앉아있는 탄탄한 몸의 소유자 때문이리라. 혁재는 뭐. 하고 말을 툭 건냈다.
“비행기 놓칠 줄 알았더니만.”
“아 누나! 빨리 가자 나 배고파.”
“새끼 성질은…, 동해씨 이제 가요.”
제게는 부라리던 눈이 운전석에 가자 유려하게 휘어진다. 하여튼 잘생긴 사람이라면 축을 못서요 축을. 속으로 끌끌, 혀를 찬 혁재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봤다. 파란 하늘에 그림처럼 구름이 쏙쏙 박혀있다. 유독 예쁜 제주의 하늘이 지겹기만 하다. 풍경을 바라보던 혁재는 다시 눈을 감았다. 공항에서 약 3,40분가량 가야 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눈이나 좀 붙이자는 심산이었다.
차 안이 고요하다. 조수석에 앉아있는 혁재의 누나인 채현도 꾸벅꾸벅 고개를 수그린다. 남매가 차에만 타면 자는 버릇은 닮았다고 생각했다. 앞만 보며 운전하던 동해가 슬쩍, 백미러로 눈을 감고 있는 혁재를 바라봤다. 아직 푹 잠들지는 않았는지 이리저리 들썩이는 얇은 몸이 보인다. 동해는 조금 더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한산한 도로에 회색 봉고차가 숭, 숭 바람을 가르며 지나갔다.
언덕 중턱에 자리잡은 큰 집으로 차가 들어간다. 푸르르. 시동이 꺼진다. 혁재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고양이마냥 기지개를 쭈욱 폈다. 그런 혁재의 옆을 지나가면서 쫙 핀 손바닥으로 등을 철썩. 내려치는 건 채현이었다. 아!! 하고 얼굴을 찡그리는 혁재를 보며 채현이 킬킬, 웃다가 집 안으로 쏙 들어간다. 그런 천방지축 남매의 뒤에서 묵묵하니 큰 캐리어를 내려주는 건 동해의 몫이었다. 짐을 내릴 생각도 못하고 초면에 짐꾼이나 시켜버렸다는 생각에 머쓱해진 혁재가 빠르게 캐리어를 제 쪽으로 가져왔다.
마음이 앞서면 실수가 잦아진다고 했던가, 졸지에 쌩하고 동해의 손에서 캐리어를 뺏어온 꼴이 되었다. 말랑한 손가락이 스쳐지나가 아무것도 없는 본인의 손바닥을 동해가 가만히 내려다 본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올려 혁재와 눈을 마주했다. 의도치 않은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혁재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튀어다녔다.
“그…, 아니 그 뺏어오려는 게 아니라….”
“…….”
“제가 하려고 하다가…, 아니, 그, 죄송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혁재에 동해도 괜찮다고 하는 것처럼 꾸벅, 인사를 더했다. 그리고는 먼저 발걸음을 집 쪽으로 옮겼다. 머쓱한 혁재가 목을 긁적이다 손에 들린 큰 캐리어를 질질 끌어 집 안으로 향했다. 따스하니 넓은 집 안쪽에서 맛있는 냄새가 퐁퐁 솟아난다. 미닫이 문으로 큰 창을 낸 거실 안으로는 햇빛이 딱 알맞게 내리 쬐고, 2층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작년부터 키웠던 흰 바탕에 검은 점들이 콕콕 박혀있는 고양이, 여름이가 앉아있다. 현관에 신발이 몇 켤레 없는 것을 보니 아직인가 싶었다.
혁재는 캐리어를 현관 옆에 두고 먼저 발걸음을 옮겨 거실에서 조금 더 들어가 구석에 자리잡은 부엌으로 향했다. 바삐 움직이는 여성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는다. 익숙하게 하던 일을 멈추고 손을 올려 혁재의 통통한 볼을 쓰다듬는 건 혁재의 엄마였고, 그 뒤에서 똑같이 너른 웃음을 지으며 모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남성은 혁재의 아빠였다. 엄마와 포옹을 하고, 아빠와 포옹을 한 혁재가 부엌 옆에 있는 식탁에 올려진 장부를 들썩였다.
12:30 3명 예약자 김윤호. 장부에는 이런 이름들이 수필로 빼곡하니 적혀있다. 주욱. 일자선으로 줄이 그어진 이름들도 있다. 도시에서의 생활을 접고 제주로 내려온 지도 어언 2년, 혁재네 집 안은 제주 살이를 할 때부터 작은 게스트하우스를 계획하며 내려왔다. 적은 인원의 손님들만 받으며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인데도 편안한 분위기 덕인지 예약은 줄줄 꽉 찬 덕분에 혁재는 이번에 휴학계를 내자마자 제주도에 내려와 일손이 되어야했다.
혁재가 제주도로 왔음에도 부족했는지 몇 일전 새로운 직원을 들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채현이 새로운 직원이 잘생겼다며 혁재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건 까닭이었다. 일도 잘하고, 몸도 좋고, 게다가 얼굴도 잘생겼다고 새벽부터 전화를 건 채현에 혁재가 귀와 볼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응. 응. 그래. 누나 말이 다 맞아. 한 것도 한 달 전인데 세삼 시간이 빠르다고 느꼈다. 흠이라기에는 흠이 아니지만 조금 불편한 점이 있다면 새로운 직원은 ‘말’을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표정 변화가 두드러지지 않게 고요하다는 점. 딱 그 둘 뿐이었다. 나 같아도 저 얼굴인데 말 못하는 게 뭔 대수겠니 바로 뽑지. 했던 채현의 말이 떠오른다. 거실에 가만히 앉아있는 청년을 혁재가 흘끔. 바라봤다.
“저 이제 올라갈게요.”
“짐 놔두고 후딱 내려와 아가. 밥 다 됐어.”
네에. 혁재가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며 부엌을 빠져나왔다. 큰 캐리어를 들고 2층까지 올라가야한다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웃긴 꼴에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초면인데 웃긴 꼴을 보여줄 순 없지. 흐으읍. 숨을 크게 들이마신 혁재가 캐리어 손잡이를 잡아 번쩍 캐리어를 들었다. 번쩍? 이게 번쩍 들릴 리가 없는데…. 가벼운 무게감에 혁재가 고개를 옮겼다. 닿는 시선의 끝에는 육안으로 보기에도 두툼하고, 핏줄이 불거져 툭, 툭 튀어 나온 단단한 손이 캐리어 모서리 끝 한 쪽을 잡고 있었다.
손목에서부터 바로 두꺼워지는 팔을 따라 올라가니 깊은 눈과 마주친다. 저 앞 바다 깊숙한 곳에서 따온 조개가 품고 있던 흑진주로 만든 것 같은 긴 속눈썹에 살짝 눈동자. 급류가 일어나는 해일 구멍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혁재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캐리어 손잡이를 잡아 위층으로 향하니 동해가 딸려온다. 위층에 도착한 후에야 동해는 혁재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아래층으로 휙, 몸을 돌려 내려갔다. 아까부터 계속 짐꾼 취급만 하는 것 같아 괜시리 갑질하는 진상이 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혁재는 복도 끝 제 방에 캐리어를 가져다 놓으며 이따가 제대로 동해와 인사를 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누군가 몸을 흔드는 느낌에 혁재가 부스스, 눈을 느릿하게 뜨며 크게 난 창문을 바라봤다. 캐리어 정리를 하다 좀만 쉬어야지 하며 침대에 누웠을 때만해도 중천이던 해는 어느새 뉘엿뉘엿 서쪽 끝에 걸려 있었다. 창문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리자 동해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혁재가 부시시한 머리를 다듬는다. 그런 혁재의 앞으로 작은 메모장이 쑥. 내밀어진다.
[저녁 드세요]
“네에….”
혁재가 대답하자 동해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곤 먼저 방을 나섰다. 동해가 방을 나서자마자 후다닥 장롱을 열어 그 안의 거울로 얼굴을 확인한 혁재가 쒯, 짧은 탄식을 뱉었다. 침 자국 대박이네….
손등으로 볼을 문댄 혁재가 방을 나섰다. 계단에서부터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들린다. 느릿하게 식탁으로 다가서자 흑진주를 콕콕 박은 눈이 진득하게 따라붙는다. 애써 모른 척 한 혁재가 아빠 옆에 앉았다. 잘 구워진 생선 조각이 갓 지어진 쌀밥 위에 얹어진다. 많이 먹어 아가. 크게 한 술을 뜬 혁재가 오물오물 볼을 움직이며 밥알들을 목 뒤로 넘겼다. 목 뒤로 진주가 또르르륵. 흘러가는 기분이다. 답답한 기분에 물로 목을 축여도 식도 한 가운데 크게 턱, 걸린 것처럼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결국 혁재는 밥을 반 밖에 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먹지 않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방으로 올라 온 혁재가 침대에 앉았다. 방문 넘어로 배 위에 달린 작은 전등들이 반딧불이 행렬처럼 이어진다. 언덕 위에 있는 집이 좋은 이유 단 하나. 멀리 있는 바다가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창문 틈 새로 짠 내가 들어오는 느낌에 혁재가 문을 좀 더 닫으려고 방문 가까이 다가갔다. 방문에 가까이 다가가면 바로 옆에 조금 나 있는 마당이 보인다. 보통은 아무도 없고 초라하게 작은 해먹만 존재하는데 거기에는 동해가 서있었다. 바다를 향해서. 시선을 느꼈는지 돌려지는 고개에 혁재가 몸을 훽 숨겼다.
왜 숨었지? 다시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난 혁재가 창문을 다시 내다봤다. 눈이 마주친다. 혁재야. 순간 머리에 웅웅 목소리가 울린다. 마치 바다 깊숙한 곳에서 고래 울음소리를 듣는 것마냥. 가만히 밖을 쳐다보자 동해가 먼저 시선을 돌린다. 착각인가. 혁재도 창문에서 벗어나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르르 눈이 감긴다.
쏴아…, 쏴아아…. 바닷소리가 저 멀리서 들린다. 소리에 깬 혁재가 아까처럼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소금을 퍼먹고 난 뒤 같은 심한 갈증에 혁재가 방을 나서 부엌으로 향했다. 거실에 있는 큰 창으로 달빛이 가득 들어온다. 달빛을 가르는 그림자가 보인다. 물을 꿀떡 삼킨 혁재가 거실 바로 앞에 딸린 테라스로 향했다. 창으로 쓰던 미닫이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은 순간, 뒤에서 야옹. 여름이가 저를 빤히 쳐다보며 운다. 여름이를 한 번, 그림자를 한 번 본 혁재가 기어코 미닫이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선다. 마당에 발을 내밀자, 혁재를 덮었던 그림자가 사라진다.
“…….”
까만 눈동자와 마주친다. 아까 식도 한 가운데에 자리를 콱 잡아 저녁식사를 망치던 흑진주가 숨을 타고 밖으로 토해 나온 기분이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바다를 등지고 저를 바라보는 동해의 곁으로 다가간다. 동해의 옆에 서자 아까처럼 머릿속이 소라껍질을 귀에 댄 것처럼 웅. 웅. 올린다. 혁재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깜깜한 바다를 수놓던 배들이 다 사라졌다. 마당 옆 가로등만 깜빡. 깜빡일 뿐이었다.
혁재.
“응….”
예쁘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예쁘네. 혁재. 이혁재. 혁재….
“으응?”
혁재가 또 눈을 깜빡인다. 제 말에 아무 말도 못하는 혁재에 동해가 가만히 웃기만 한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내내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던 동해의 웃음. 몰려오는 졸음에 혁재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뜬다.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이름 석 자를 부르며 일어나라고 이불보를 뒤집는 채현에 혁재가 머리에 까치집을 짓고는 채현을 멍하니 올려다본다. 분명 어제, 마당에서…. 기억을 더듬던 혁재가 채현의 어깨 너머로 열려있는 방문을 지나가는 동해를 쳐다봤다. 대화를 나눈 것 같은데…. 꿈같은 현실에 어그적어그적, 뒤집혀진 이불보를 다시 바로 했다.
시간이 정신 없이 혼자서 막 달려간 바람에 벌써 3주가 지났다. 그동안 동해와 별 다른 말을 해보지도 못한 채였다. 집 안에 새로운 사람을 들인다는 건 또 다른 문화를 체험하는 것과 같다. 어제 이 게스트하우스에 오자마자 왁자지껄 제 집마냥 적응해가는 사람들에 혁재는 제 집인데도 이유 모를 어색함을 느꼈다. 채현은 그러지도 않은 지 새로운 손님 무리에 녹아든다. 거실에 앉아서 가운데에 음료수 병을 놓고 빙글빙글 돌리며 떠드는 무리 사이에는 동해도 있었다. 부엌에서 나오는 혁재를 발견한 손님 무리 중 한 명이 혁재를 이끌어 무리 사이에 앉힌다. 반대편에는 동해가 앉아있었다. 앞을 쳐다볼 수 없는 혁재가 빈 음료수 병을 가만히 쳐다봤다. 팔을 둥글게 돌리며 무리를 이루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게 올라간다. 단 두 명, 동해와 혁재만 빼고.
“신나고~ 재미있는~ 진실~ 게임~! 이번엔~ 누구~!?”
휙, 휙 돌아가는 음료수 병 입구가 동해를 가르킨다. 신난 무리들의 목소리가 더 높이 올라간다. 제일 좋아하는 취미가 뭐예요? 질문에 혁재가 괜히 침을 꼴딱. 삼켰다. 들키지 않게 눈을 위로 살짝 뜨며 열심히 종이에 적는 동해의 손끝을 바라봤다. 여전히 반듯하고 어딘가 화려한 얼굴과 다르게 투박하고 두꺼운 손이었다.
[흐린 날 수영하기]
“흐린 날? 왜요?”
[피부가 안 따가워서 좋아요]
“아~ 근데 흐린 날이 자외선 더 강하지 않나? 아무튼! 그럼 동해가 돌려요!”
또 음료수 병이 휙. 휙. 휙 돌아간다. 이번에 음료수 병 입구가 가리킨 사람은, 또 동해였다. 사람들이 와학학. 웃는다. 그럼 옆에 있는 사람이 질문하라며 채현을 바라본다. 주변의 눈치를 본 채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채현의 질문에 다들 숨을 죽인다. 아마 이 제주도에서 제일 잘생긴 사람인 게 분명한 동해의 이상형이라니. 다들 궁금할 법했다. 그건 동해의 맞은 편에 앉은 혁재도 마찬가지였다. 눈은 제 자신의 발끝을 향하면서 은근슬쩍 동해가 적고 있는 종이에 시선을 둔다. 고민 하나도 없이 단번에 적은 동해가 종이를 내밀었다.
[예쁜 사람]
동해의 종이에 다들 저마다 탄식을 내놓는다. 저 얼굴에 비길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동해의 대답에서 시선을 뗀 혁재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 혁재에 모든 눈동자들이 혁재에게 향한다. 그 안의 흑진주도 함께. 뭐냐는 채현의 말에 하, 할 일이 있어서…. 말을 더듬거린 혁재가 도망가듯 위층으로 올라왔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또 울린다. 예쁘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정작 말을 한 당사자는 한 적이 없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군다. 진짜 그런 꿈이라도 꾼 건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뺨을 손으로 내려쳤다. 아…, 아프네. 지금은 현실이었다.
찌르르…. 귀뚜라미가 새벽을 알린다. 동쪽에서 나올 채비를 하고 있는 해가 살풋 보인다. 언덕을 내려와 바위를 타고 바닷가에 온 동해가 주변을 살폈다. 후읍. 숨을 크게 들이쉰다. 몸 안 쪽 깊숙히 들어오는 짠내들에 몸들의 근육들이 하나 둘 씩 살아나는 기분이다. 그런 동해를 게슴츠레 바라보는 것이 있다.
“좋냐?”
“…어. 왜.”
“어휴… 드응신. 하루 죙일 말도 못하는데 좋단다 어휴. 어휴. 어휴.”
“시비야 또.”
동해와 말을 주고받은 것이 철썩. 물 표면 위로 꼬리를 내어 한 번 채찍질을 한다. 햇빛을 받은 물방울들이 톡톡 튀어 동해가 입은 하얀 티 위로 닿았다. 축축한 느낌에 옷을 손으로 털어낸 동해가 강렬한 빛에 눈을 찌푸리며 그것을 쳐다본다. 동해와 말을 나누는 것은 사람의 형상은 맞으나 어깨 밑으로는 죄다 물에 잠겨있고 손에는 살짝 물갈퀴가 나있다. 분명히 사람은 아닌 듯 했다.
“너 안 잊었지? 30일이다.”
“…알아.”
“눈 피하지 말고! 우린 인어도 아니라 사랑을 얻든, 뭘 하든 30일 안에 물로 돌아와야 안 죽어.”
“안다고.”
“벌써 일주일 밖에 안 남았다고!”
꽥 소리지르는 것에 동해가 귀를 손으로 막았다. 그런 동해를 보며 머릴 절레 절레 저은 것은 물 안으로 쏙, 하고 사라진다. 가만히 요동치는 파도를 바라보던 동해가 다시 바위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마당에 들어서자 가만히 해먹에 앉아 햇빛을 쬐는 혁재와 마주친다. 동해가 물 위로 올라오게 만든 원인. 동해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속눈썹이 들리고 옅은 밤빛의 눈동자가 나타난다. 진하게 얽힌다. 동해도 혁재도 둘 다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서로를 응시했다.
동해가 눈꺼풀을 움직여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뜨자 혁재도 동해를 따라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뜬다. 마치 탐색을 하는 고양이처럼 서로를 바라본다. 동해가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더 했다. 이 전까지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사를 받고나서야 정신이 들어왔는지 혁재가 해먹 위에서 우왕자왕하다 몸이 뒤로 넘어간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동해가 재빨리 혁재의 등을 너른 손바닥으로 탄탄히 받친다. 얼굴이 가깝다. 저를 올려다 보는 눈에 당혹감이 강력하게 서려있다. 손에 힘을 주어 혁재를 일으킨 동해가 다시 꾸벅. 가벼운 목인사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른 날개뼈 밑 부분이 닿았던 손바닥이 아릿아릿. 저려온다. 가만히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한 번 주먹을 쥔다. 일주일 밖에 안 남았다고! 하며 소리치던 것이 떠오른다.
오랜만에 봉고차 내부가 시끌벅적하다. 시내에 나간다는 투숙객들에 친절하게도 동해와 혁재가 데려다 달라고 한 엄마의 말 덕분이었다. 신이 나 이것저것 떠드는 투숙객들에 혁재가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핸들을 잡은 탄탄한 팔이 시야 끝에 걸린다. 아무 말 않고-못하는거지만- 정면만을 바라보며 운전을 하는 동해의 모습에 이 전에 들었던 말들이 머릿속에 두둥실 떠다닌다. 예쁘다. 예쁜 사람. 창문을 열어놔 사이드미러에 비춰진 제 모습을 쳐다본다. …내가 이쁜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에 이유모를 부끄러움이 밀려와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감사합니다! 짤막한 인삿말과 함께 우르르 투숙객들이 차에서 내린다. 왁자지껄 가는 뒷모습들이 청춘의 한 장면이다. 열어놓았던 창문이 닫히고, 에어컨이 우웅. 돌아간다. 봉고차가 왔던 길을 돌아간다. 아까와 달리 고요한 내부에 혁재가 몸을 들썩였다. 어색한 공기 탓이었다. 혁재가 목을 큼. 큼. 가다듬었다.
“…동해. 제가 예뻐요?”
백미러로 저를 쳐다보는 눈동자와 마주친다. 물어봐놓고도 당장이라도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은 기분이다. 이딴 걸 왜 물어봐 이혁재 멍청한 놈아. 혁재가 감당치 못할 부끄러움에 창문 밖을 쳐다봤다. 닫힌 창문에 그려진 하늘에 뜬 시원하게 트인 머리가 확실하게 끄덕인다. 귓바퀴가 홧홧하다.
집으로 다시 향해야 하는 거면 지금 이 사거리에서 직진인데 갑자기 차가 휙, 오른쪽으로 꺾인다. 어? 동해 어디가요? 혁재의 물음에 동해가 씩 이름처럼 시원하게도 웃는다. 탁 트인 도로에 바람과 경주를 하듯 달리던 차가 도착한 곳은 이름 나지 않은 조용한 해변가였다. 검은 자갈들로 이뤄진 해변가와 캉캉 레이스처럼 펼쳐진 흰 파도들이 예쁘다. 우와. 혁재의 가슴이 한 껏 올라갔다. 제주도에 내려오자마자 몇 주를 구른 덕에 바다 한 번 제대로 구경해보지 못했는데 제주의 바다는 이렇게 이쁘구나 다시 한 번 느낀 혁재가 신고 나왔던 슬리퍼를 벗어 차가운 바다에 발을 댄다.
파도가 부드럽게 말을 만지고 도망간다. 바다에 도착하니 현실은 죄다 물에 섞여 희석된 기분이다. 한층 올라간 기분에 혁재가 조금 뒤에서 저를 보기만 하는 동해를 향해 이리 오라며 크게 손짓했다. 머뭇거리던 동해는 기어코 동해! 빨리 와요! 라고 혁재가 소리치게 만든다. 애들처럼 발을 담그고 물장구를 친다. 소년 같은 웃음소리가 구름을 콕콕 찌른다. 그렇게 이십 여분을 놀았을까 풀에 지친 혁재가 따스히 빛을 받은 넓은 돌에 엉덩이를 붙였다. 뒤를 짚고 하늘을 바라본다. 지겹기만 했던 푸른 하늘이 오늘은 반가운 기분이다.
“동해.”
“…….”
“내가 왜…, 제주에 왔는 지 알아요?”
“…….”
“나는 내가 나무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잡초였다는 걸 느끼고 나니까…, 견디지 못하겠는거야. 막 밟히는 것 같고, 곧 농부 손에 뽑힐 것 같고….”
가만히 수평선을 바라보던 동해가 고갤 돌려 혁재를 쳐다본다. 혁재는 여전히 유유자적 흘러가는 구름에 시선을 맡긴 채였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혁재의 향기를 가지고 동해를 휘감았다가 향기만 버리고 쑥 사라진다.
“사실은 도망쳤어요. 육지로부터, 현실로부터.”
“…….”
“아 이런 얘길 왜 하지? 아무튼 고맙다구요.”
혁재가 동해를 향해 씨익 웃는다. 가슴이 꽈악 차오른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전하지 못할 기분이다. 왜 그런 기분이 있지 않은가, 감정이 솜사탕이 된 듯 크게 부풀어 올라서 재채기를 할 것만 같은 기분. 주머니 속 늘 가지고 다니던 메모장이 허벅지를 콕콕 찌른다. 나를 써. 동해. 너를 전해. 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동해가 주머니에 손을 가져가려다 만다. 엉거주춤한 손을 꽉 쥐었다가 다시 편다.
인간에게 목소리를 전하면 안돼. 우리는 인간을 홀리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뭍에 올라올 때 신신당부하던 것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층 미간을 구기고 세 번이나 해주던 말. 그럼에도 동해는…,
“혁재. 좋아해.”
아. 동해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저를 쳐다보는 혁재의 눈에 아까까지만 해도 반짝였던 광이 사라진다.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혁재에 동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대로 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혁재의 눈을 가린다. 그러자 전원꺼진 로봇처럼 혁재가 추욱, 동해 품에 쓰러졌다. 혁재의 등과 무릎에 팔을 끼워넣어 안아들은 동해가 봉고차로 돌아왔다. 조수석에 눕히고 꼼꼼하게 안전벨트까지 해주고 나서야 동해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부르르. 시동이 걸리고 바퀴가 둥글, 굴러간다. 아까와 사뭇 다른 분위기다. 집에 도착했는데도 혁재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운전석에서 내려 혁재를 아까처럼 안아들은 동해가 애가 왜 그러냐는 엄마의 물음에 고개만 꾸벅, 숙이고는 2층 끝 혁재의 방으로 향했다. 푹신한 이불 위에 혁재를 눕힌다. 백설공주마냥 감겨진 눈을 살풋 가리는 어두운 갈색 머리칼을 매만진다.
‘울지마. 나는 진주같은 거 필요 없어. 네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릴 적 저의 마음을 뺏어간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동해의 손이 선을 따라 혁재의 입술에 닿는다. 말랑한 촉감이 불처럼 홧홧하게 손가락 끝에 머문다. 사람을 홀리는 괴물은 저인데도 동해는 홀린 것처럼 몸을 숙여 제 입술을 말랑한 표면 위에 맞대었다. 푸석한 입술에 부드러운 촉감이 닿는다. 사탕수수를 입에 가득 털어 놓은 것처럼 달다. 몸을 편 동해가 입맛을 다셨다. 입 안이 절여진 느낌이다. 일주일…. 날짜를 곱씹었다.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곁에서 맴도는 것 뿐이다. 지구 공전에 얽힌 달처럼.
들어온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일주일이나 머물던 투숙객들이 이제 육지로 올라간다며 집을 나서자 시끌벅적했었던 집 분위기가 축 가라앉는다. 설상가상으로 하늘도 비는 내리지 않는데 회색 수채화를 부어버린 느낌으로 흐릿하다. 혁재가 가만히 거실 쇼파에 앉아있었다.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는 채현이 가만히 있기만 하는 혁재에 인상을 찌푸리고 짜증을 내었다.
“야! 이 정 없는 놈아!”
대뜸 짜증을 내는 채현에 혁재가 눈을 깜빡였다. 당최 무슨 소리인 지 모르겠다는 눈빛이다. 투숙객이 머물다 나가는 게 한 두번도 아닌데 저렇게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일인가? 혁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에 있던 복숭아를 혁재에게 던졌다. 철퍽.하고 복숭아가 거실 바닥에 살갗을 다 드러내며 뭉개진다. 혁재가 복숭아를 집어들었다.
“왜 시비야 또.”
“오늘 동해씨 마지막 날이란 말이야.”
“…뭐?”
“몰랐어? 으이구 쯧쯧. 동해씨가 그렇게 널 챙겨줬는데도 모르고. 이따가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
혁재를 한 번 쏘아본 채현이 그대로 다시 동해가 있던 마당으로 복숭아가 잘 잘려진 접시를 들고 나갔다. 마지막이라고 한 번도 한 적 없는데…. 창 밖으로 채현에게 꾸벅, 목인사를 하는 동해와 그런 동해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채현의 모습이 보인다. 그 광경을 쳐다보던 혁재가 발을 굴러 단숨에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급히 들어온 혁재가 캐리어고 서랍이고 뒤적이며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다. 서랍의 구석에서 손이 걸리는 것이 있다. 투명하게 맑은 진주. 나한테 이런 게 있었나? 혁재가 한 쪽 눈을 찡그리며 진주 속을 쳐다본다. 조금씩 일렁이는 것들이 묘한 느낌이다. 밑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혁재가 진주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시 밑으로 내려왔다.
“동해씨 이제 간대.”
“어…, 아! 제,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공항이면 되죠?”
동해보다 먼저 후다닥 나와 봉고차 운전석에 올라탄 혁재가 침을 꼴딱 삼켰다. 바지 주머니에 넣은 작은 진주의 존재감이 크다. 동해가 이어서 조수석에 올라탔다. 부릉, 시동이 걸리고 데굴, 바퀴가 굴러간다. 오늘따라 도로가 뻥뻥 뚫린다. 40여분 걸렸던 공항까지 20분이면 도착할 것 같은 예감이다. 혁재가 눈을 도르륵 굴렸다. 입이 메말라간다. 그런데도 끈적한게 달라붙기라도 한 듯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어코 20분 만에 공항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주차하는 것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는 혁재가 큼, 큼. 헛기침을 하며 앞에 고정 되어있는 동해의 시선을 가져왔다. 혁재가 주머니에 있던 투명한 진주를 꺼내 동해에게 내밀었다. 혁재 손바닥에 있던 진주를 한 번, 혁재를 한 번 쳐다본 동해가 눈을 두 번 깜빡였다.
“가져요. 그…, 기념으로.”
“…….”
동해가 손을 뻗는다. 진주를 가져가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혁재의 손등을 덮고 손가락을 구부려 진주를 덮는다. 동해가 거절하자 혁재의 귀가 화르륵 타올랐다. 거절할 줄 몰랐는데…. 당연히 동해가 제 선물을 받아줄 줄 알았던 모양이었는지 또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그대로 혁재의 손을 덮은 동해가 바지 주머니에서 메모장을 꺼내 허벅지에 올려 놓는다. 손을 잡은 그대로 반대 손으로 글씨를 슥, 슥 적어낸다.
[제 선물이에요]
이게 무슨 소리야. 이거 내가 준 건데…. 혁재가 중얼거리자 동해가 큭큭, 낮게 웃는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혁재가 동해를 쳐다보자 메모 한 장을 뒤로 넘긴 동해가 다시 글씨를 적는다.
[잘 생각해봐요]
[갈게요 혁재]
그리고는 혁재가 안 보이게 몸을 돌려 가리고 글씨를 한 번 더 쓰고는 고이 접어 진주가 들어있는 혁재 손에 쥐어준다. 마지막으로 환하게 웃은 동해가 차에서 내렸다. 살짝 기분이 상한 혁재가 그대로 차 시동을 걸었다. 그대로 차가 빠져 나갈 때까지 내린 곳에서 서있는 동해가 사이드미러에 비춰진다. 공항에 올 때처럼 한산한 도로에 혁재는 엑셀레이터를 조금 더 밟았다.
동해가 봉고차가 수평선에 먹힐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바라봤다. 손 끝이 저릿하다. 내내 신경 쓰였는데 이제야 부서지는 손 끝에 희미하게 미소가 인다. 햇볕에 피부가 닿을 때처럼 엄청나게 따끔하다더니 별로 그렇지도 않은 느낌이다. 동해가 그대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근처 아무렇게나 깎인 절벽에 다다랐다. 좋은 햇빛이다. 햇빛에 있을 때 제일 예쁜 혁재를 떠올린다. 사랑에 후회는 없다. 절벽 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햇빛이 부셔지듯 절벽에 말 못하는 아무렇게나 밟혔던 흔적이 가득한 작은 풀들을 비춘다.
잘 데려다주고 왔냐는 물음에 손을 혁재가 손을 휘적휘적 젓고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야아옹. 여름이가 혁재의 다리에 머리를 부빈다. 여름이의 머리를 슥, 슥 쓰담은 혁재가 다시 계단을 오르고 방으로 향한다. 방에 오자마자 털썩 침대에 누운 혁재가 아무렇게나 넣어놔 꼬깃하게 접힌 종이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진주가 또르륵. 바닥으로 굴러가 침대 밑으로 쏙 들어간다. 아이씨. 진주를 찾는 것보다 귀찮음이 더 큰 혁재가 일으켰던 몸을 다시 풀썩, 침대에 눕혔다. 동해가 전해준 쪽지를 조심스럽게 편다. 얼굴과 달리 조금 삐뚤빼뚤한 글씨가 퍽 어린아이같다.
혁재가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입술을 꽉 깨문다. 그동안 보여줬던 동해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늘 식사를 할 때면 혁재의 자리에 앉는다던가, 먹어야 버릇이 든다며 건네주는 혁재의 몫의 해산물을 몰래 먹어준다던가, 슬쩍, 아닌 척 손가락을 스치고 지나간다던가 하는 것들. 제주도에 내려오고 한 달동안은 곁에 동해가 없던 적이 없었다. 사실 몰랐던 건 아니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겁부터 나서. 꼬깃한 종이를 팡, 팡 손바닥으로 핀다. 결국은 손바닥에 붙어 부욱, 찢어지고야 만다.
[예뻐요]
지난 번 이름 모를 검은 해변에서 봤던 말간 웃음이 떠오른다. 햇빛을 가득 담은 웃음. 가슴이 먹먹하다. 혁재는 답답함에 명치께를 주먹으로 퍽, 퍽 쳤다.
하늘이 높다. 매미가 신나게 울어재낄 때만 해도 낮은 느낌이었는데, 매미가 들어가고 코 끝에 차가움이 살짝 서리니 하늘이 드높다. 가을이 오고 있었다. 엄마는 가을에는 잠시 게스트 하우스를 쉰다고 했다. 제주도에 내려왔을 때부터 달렸던 탓이었다. 우중충하니 비는 내리지 않고 구름만 희뿌연 하늘을 바라보던 혁재가 채현에게 말을 걸었다.
“누나.”
“왜.”
“수영 갈까?”
“이렇게 흐린 날에? 미쳤니?”
그런가…, 혁재가 시선을 하늘에 고정한 채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흐린 날에 수영하기 좋다고…. 근본 모를 정보에 혁재의 입술이 뚱. 하니 나온다.
“누나.”
“아. 왜.”
“우리 그…, 남자 직원 있지 않았어?”
“얘가 아까부터 뭔 소리야. 미쳐도 곱게 미쳐라.”
그런가…? 혁재가 한 번 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분명 우리말고도 누가 있었던 것 같은데.
[예뻐요]
“진짜 꿈이었나….”
알 수 없는 말에 질린 채현이 무릎에 있던 여름이를 내려놓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하늘이 여전히 우중충하다. 저릿한 짠내와 파도가 부서지는 소음이 창문을 두드리는 느낌에 혁재가 눈을 감았다. 밀려오는 졸음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