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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고 볼 수 있는 것

취준심체요절

모든 관계는 단어 몇 개로 정의되었다. 동해의 안에서 웬만한 사람들은 다 그랬다. 엄마, 아빠, 누나, 친구들, 좋아하는 애. 이러한 단어를 달았던 관계들은 친구였던 애, 좋아했던 애, 처럼 과거형이 될지언정 아예 바뀌는 경우는 생각보다 잘 없었다. 지금 옆에서 커피를 마시는 엄마가 갑자기 집나간 아빠가 될리 없는 것처럼 말이다. 동해에게 있어서 바뀐다,는 것은 끝나는 것이었다.

동해의 관계들은 꽤나 단편적이었다. 동해 스스로 관계를 바꾸려는 시도를 굳이 하지 않았고, 상대방도 마찬가지였으므로 바뀔 일이 없었다. 그러한 관계양상은 역할극과도 닮았다. '우리 이런 관계가 되자' 라고 선을 그어놓는 것이다. 가끔 관계를 바꾸려는 시도가 있어도 동해가 칼 같이 잘랐다. 동해는 명확한 게 편했다. 쉬운 게 좋았고. 세상 사는 일도 어려운데 이런 것까지 머리 아파야 되는 건가? 필터 입힌 먹먹한 색감의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 말했다. 동해는 소파에 몸을 기대 멍하니 화면을 봤다. 드라마 속 대사지만 동해는 그것이 꽤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일로도 충분히 머리 아픈데 굳이 인간관계로 부러 머리 아플 필요는 없었다.

이제까지 동해가 해온 옳은 관계정립엔 한 번도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다. 단, 이혁재의 경우를 제외하면.

 

하지만 이젠 그러한 정의는 의미 없었다. 5년 전, 지구 인근 위성 간 충돌의 여파로 몇 달간 지구엔 별들이 쏟아져내렸다. 일주일 정도로 끝날 것이라는 낙관적 예측과는 달리, 인근 위성까지 궤도를 이탈하며 곧 상황은 급속히 심각해졌다. 부상자와 난민은 매일 두려운 수로 늘어갔고 죽는 게 차라리 운이 좋은 것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한두 곳을 빼곤 파산하는 국가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한두 강대국마저도 다른 나라를 지원해줄 여력이 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정부의 존재는 희미해졌다. 한국은 인터넷과 편의시설 의존도가 높았던 만큼 그로인한 피해가 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때 도움을 받지 못했다. 산이 무너지고, 해일이 왔다. 산과 바다 인근 지역 못지 않게 도심의 피해 또한 극심했다. 운석이 아파트에 떨어진 경우, 그 안의 사람은 구조를 바라지도 못한 채 생매장되었다. 역시 즉사가 호상이었다. 인구 밀집도가 높은 도시는 구호인력들이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곳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고립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사회적 위치는 의미 없어졌다. 과장, 대리 등의 직급은 강도, 도둑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한국은 삼분할 되었다. 운석으로 인한 교통과 통신 단절로 중부권과 전라도 경남 간의 소통이 불가능했다. 서울·경기·인천과 의료인들과 군인들, 소수의 공무원들은 보호 받았으나 그만한 책임을 부여받았다. 이 책임이 싫어서 도망치고 탈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가는 이들에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개인이 선택할 자유에 대한 문제는 둘째치고, 그들을 통제할 수단이 적었다.
관계에 대한 정의는 개인의 사회적 지위가 있을 때 의미 있다. 이제 사회적 지위가 없는 것이나 다름 없게 된 동해에게 관계에 대한 호칭은 무가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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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 배출량의 증가로 대기 온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대기 온도라는 말이─,”

동해는 뻐근한 어깨를 움츠리며 잠에서 깬다. 잠깐 켜진 라디오는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가득한 소리를 내다 곧바로 꺼졌다.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자는 건 몇 년이 지나도 불편했다. 그나마 침낭과 이불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이제 동해의 옆에는 스마트폰과 교과서가 아닌 라디오와 공구, 최소 식재, 생필품을 우겨넣은 배낭이 있다. 물은 귀했으나 아예 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쓰레기 더미에서 터지지 않은 생수병을 발견한 동해가 곧바로 물을 들이켰다. 기상했으니 매일의 일과를 할 때였다. 동해는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걸을 때마다 자잘한 돌이 튀었다. 아지랑이가 공기를 타고 올라왔다.

동해의 일과는 규칙적인듯 매번 달랐다. 서울을 크게 다섯 등분해서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밤이 되면 그 자리에서 잠에 들었다. 매일 조금씩 환경이 달라졌고 매일 먹는 것, 입는 것, 잠자는 곳이 조금씩 바뀌었다. 공통점은 주인 없는 물건이라는 것과 인스턴트 식품 위주라는 것. 동해는 매일 그것을 하지 않으면 세상이 잘못되는 것처럼 서울을 돌았다. 강북과 강남을 잇는 다리 중 하나가 아직 건재하다는 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사람에만 아니라 동해에게도 큰 행운이었다.

다리로 가는 길, 동해는 자신이 딛은 땅과 크레이터 그 경계에 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한 높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었다. 동해는 가끔 그 안에 떨어지면 어떨지 생각해보곤 했다. 붕괴된 상황은 자연스레 죽음을 연상시켰다. 종말론자들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울엔 비교적 작은 운석들이 떨어졌다. 그 중 성북구와 서초구에 떨어진 것들이 그나마 컸다. 그것들은 움푹 패인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다음으로 중구, 송파구, 동작구에 떨어진 것들이 있었다. 다른 자잘한 것들은 눈발처럼 쏟아져 건물들을 파괴했다. 이런 상황에도 살 사람은 살았다. 미세하게 빗겨나가 살 수 있었던 사람과 운이 좋아 다른 곳에 있었던 사람, 피할 수 있던 사람으로 나뉘었다.

동해는 첫번째 유형에 속했다. 집에 가기 직전 걸려온 엄마의 전화는 엄마의 사랑이 가져다준 기적이었고, 무너지는 건물 잔해에 맞지 않은 것은 천운이었다. 이러한 천운이 엄마에게도 갔는지 동해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자신의 사랑이 엄마의 사랑보다 크지 않아 그런 건가, 원망은 이미 방향을 잃은지 오래였다. 그저 집착처럼 한 가지의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기 때문에.

 

새벽이 되면 해가 뜨듯이 지구 문명이 파괴되어도 시간은 흘러간다. 사람들의 행동 양상은 하루가 지나갈 수록 달라졌다. 첫 날은 암전이었다. 농촌이 아닌 도심의 불빛이 더 일찍 꺼졌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생명이 어떻게 될지 모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둘쨋날은 소란이었다. 사람들은 정부가 어떻게 된 건지, 경제 회생 가능성은 있는지, 앞으로의 비전, 이 사건으로 유망할 주식 등에 대해 떠들었다. 인터넷이 되는 소수 지역에선 여기저기의 소식을 라디오로 퍼날랐다. 셋째날은 혼란이었다. 전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된 사람들은 자잘히 땅에 박힌 운석을 피하며 각자가 하고싶었던 것을 했다.

무법지대라는 말은 맞지 않았다. 법은 공공의 무언가가 아닌 한 개인의 신념으로 형태가 바뀌었고, 각 무리의 우두머리의 성향에 따라 다른 법이 있었으니까. 무리 외의 인간이 살아남긴 쉽지 않았다. 동해는 평소엔 혼자 다녔지만, 주기적으로 들리게 되는 무리가 있었다. 남에서 시작해서 우리가 된 사람들. 그들 덕분에 동해는 지금까지 살 수 있었다. 점점 한 번 정해진 관계가 잘 바뀌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그 또한 불변하진 않았다. 그것을 실감할 때면 동해는 더욱 엄마가 보고 싶었다. 친구였던 사람이 친구가 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엄마는 자신의 엄마가 아니게 될 리 없으니까.

모순적이게도 이렇게 되고나서야 인간생존에 대한 욕구보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졌다. 동해가 매일 서울의 구획을 나누어 살피는 건 이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살아있다면 분명히 자신을 만나러 서울로 올 것이고,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란 믿음. 믿음을 넘어선 강박적 사고. 하지만 동해는 이제 서울에서 어머니를 볼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이제 서울을 떠나 다른 곳을 가볼 때였다.

 

그런 고행 속 혁재를 보게 된 것은 동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언뜻 보았을 뿐인데, 동해는 그날 혁재의 꿈을 꿨다.

꿈 속에서 동해는 과거 여러 시점을 빙빙 돌았다. 동해는 모르는 사이에 푸른 형광등 아래 서늘하고 칙칙한 교실에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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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반친구로서였다. 희멀건 애가 댄스부에 들었다니 눈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었다. 이혁재는 반의 아이돌이었으나 본인은 그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어 보였다. 동해 또한 혁재를 처음 보고 튄다고만 생각했다. 그게 첫 인상의 끝. 이혁재는 처음엔 튀는 반 친구였다.

이혁재는 조용한 편이었는데, 그게 이혁재를 더 눈에 띄게 했다. 혁재가 시끄러웠다면 오히려 주목을 덜 받았을 것이다. 동해와 혁재는 자리도 떨어져 있던 데다 혁재가 댄스부 연습으로 반에 없을 때도 많았으므로 접점이 적었다. 그나마 자주 마주할 때가 축구를 할 때였다. 반 아이들은 서로 친하지 않아도 곧잘 축구를 같이 하곤 했다. 운동장에서 뛸 때면 혁재는 평소보다 훨씬 상기된 웃음을 띄고 있어 좋은 쪽으로 낯설었다.

혁재의 얼굴은 새빨갰어도 손에 닿는 체온은 미지근했다. 음료수를 건네주며 손이 닿을 때 동해가 느낀 점이었다. 미지근한 혁재는 손이 떨어진 동시에 차가운 물방울이 동해의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순간적으로 시선을 느낀 혁재가 물었다. "왜?" "아니 그냥," 동해는 말을 돌렸다. 뭐하는 짓이냐고 생각하며 동해는 얼굴을 씻었다. 쏟아지는 물과 함께 이유 모를 열기가 씻겨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학교가 녹아내렸다. 아이들의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동해의 정신은 얕은 곳으로 잠시 올라왔다 더 깊이 가라앉는다. 이 꿈에서 깨고싶으면서도 깨고싶지 않은 마음이 동해를 붙든다.

 

난민들이 모여있는 곳은 후덥지근했다. 바깥의 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 틈사이에 끼어 겨우 대피소에 들어온 동해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개미떼처럼 모인 사람떼는 속을 답답해지게 하는 면이 있었다. 갓 새내기 이름표를 뗀 사람이 감내하긴 과했다. 하지만 그건 여기 모인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기에 동해는 울음소리를 삼키고 조용히 울었다.

엄마의 생사, 생존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모든 것이 동해를 불안하게 했다. 동해는 슬퍼서가 아니라 불안해서 눈물이 났다.

문득, 동해는 혁재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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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맞지! 동해가 긴장한 것과는 다르게, 혁재는 그저 반가워보였다. 네가 살아있을 줄은 몰랐네, 반갑다. 인삿말에도 동해는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혁재가 원래 알던 사람인 것은 상관 없었다. 못 보던 사람을 갑자기 마주치는 것이 위험한 환경이 되었다. 동해의 반응이 어떻든 혁재는 계속 말을 했다. 원래 이렇게 말이 많지 않았던 것 같아 더 수상했던 동시에, 옛날이 생각나서 기분이 이상했다. 동해에게 혁재는 운석 충돌 이전의 인물이었다.

혁재는 어떤 생각인 건지 동해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대화를 나눌 수록 악의는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동해와 혁재는 동행하게 되었다. 혁재의 목적지가 동해와 같았다는 것도 한몫을 했다.

 

절기상 가을일텐데도 날씨는 점점 더워지는 듯했다. 비가 오지 않은지도 오래되었다. 옷은 최대한 얇게 입을 수 있었지만 짐은 줄이지 못했다. 혁재의 짐은 동해의 것보다도 많았다. 이걸 어떻게 들고다니냐 물었더니 혁재는 눈짓으로 끌차를 가리켰다. 동해는 질린 표정을 했다.

사람이 없으면 환경이 나아진다던데, 날씨는 갈 수록 왜 이러냐. 동해가 말했다. 진짜 지구가 망해가나보지, 혁재의 심드렁한 말에 동해가 대답했다. 지구는 이미 망했어.

“이럴 때일수록 희망을 가져야지.”

“이런 상황에서도 긍정적이긴 하네ÿ.”

동해와 혁재는 무너진 건물 옆을 지나갔다. 말라가고 있는 담쟁이 넝쿨과 각종 이름모를 식물들에 뒤덮인 모습은 언제 봐도 기분이 나빴다. 폐허가 가까이 있는 일상은 사람을 우울하게 했다. 계속 풍경이 몇 번이나 바뀔 정도로 걸었다. 공장, 학교, 주택가ÿ 많은 곳을 지났지만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전부 부서졌고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해는 이제 사람보다 동물이랑 곤충이 더 많겠다, 라고 말했고 혁재는 이에 침묵으로 동의했다.

 

전처럼 우울감에 빠지지 않은 것은 옆에 혁재가 있어서 일 것이다. 운석충동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동해는 요 몇 년 중 스스로가 제일 들떠있다고 생각했다.

혁재와는 계속 옛날 얘기를 했다. 동해는 충돌 이후 살아온 얘기를 종종 했지만 혁재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은 본 적 없었다. 힘든 시기니까. 동해는 일부러 혁재에게 얘기 해달라 보채지 않았다. 딱 한 번 소형 발전기나 모니터 등이 주변에 있던 때는 혁재가 갖고 있던 영상을 틀었다. 그건 또 어디서 났어? 몰래 가져왔지. 동해가 조금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혁재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너무 갖고싶어서, 이것만 있으면 언제든 예전 모습을 볼 수 있잖아.

사실 그건 가공된 현실일텐데도, 동해는 혁재의 말을 이해했고, 일부 공감했다.

 

영상엔 종종 보던 드라마 속 남자 배우가 나왔다. 혁재는 영화라 생각하고 가져온 것 같지만,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오래된 예능 속 사람들은 환하게 웃었다. 재밌게 대화를 나누는 중간에 배우들이 연기했던 짧은 클립들이 나왔다. ‘네가 내 운명인 것 같아,’ ‘세상 사는 일도 어려운데 이런 것까지 머리 아파야 되는 건가?’ ‘사랑해요, 정말로.’ 절절하게 사랑을 외치는 인물들을 보니 왠지 눈물이 나왔다. 현실에서 느낄 여유가 없는 것을 그리워 하는 것일까.

 

점점 처음의 긴장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안정감만 남았다. 하지만 그게 서로 편하게만 대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동해는 혁재와 함께 다닌 후로 부쩍 꿈을 꾸는 일이 잦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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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는 다시 흙먼지 나는 초여름의 운동장으로 돌아갔다. 시원한 생수와 미지근한 혁재의 팔, 홧홧한 귀가 꿈 속에도 생생했다. 갈수록 매 장면은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고 그 속에 혁재의 얼굴만 조금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동해는 자신에게 온 모든 변화가 낯설었다. 욱하는 일이 잦아졌고, 눈물이 많아졌다. 기분은 자주 상승 기류를 탔다가, 곧바로 하강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이 모든 건 이혁재, 이혁재 때문에.

변화를 그리 달가워하지만은 않는 동해가 제일 처음 한 일은 변화의 원인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시기적절하게 자리가 바뀌었다. 이제 더는 혁재의 옆자리에서 혼자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였다. 동해는 학교에서 하루종일 잠만 잤다. 낮에 자니 새벽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동해는 혼자 새벽에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밤을 샜다.

 

매번 동해는 학교에서 뛰쳐나와 집에 가서 같은 내용의 일기를 썼다. 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넌 항상 나를 당황하게 만들어. 널 보면 괜히 나를 숨기고 싶고, 도망치고 싶어. 그래도 정말로 멀어지긴 싫어서 자꾸 네 눈치를 보게 돼. 삐뚤빼뚤하게 꾹꾹 눌러쓴 글씨는 언제봐도 이상해서 추했다. 동해는 매번 썼던 내용을 다시 쓰고 매번 종이를 찢어 버렸다.

 

그렇게 일기를 쓰고나면, 동해는 한참을 꿈속에서 펑펑 울었다. 눈물의 이유도 모르고 울다 지쳐 죽을 때까지. 그렇게 울다 깨고 나면 신기하게도 눈가에 어떠한 물기도 없는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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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는 축축함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위쪽에 뚫린 구멍으로 비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동해는 옆에서 자고 있던 혁재를 흔들어 깨웠다. 백일만에 온 비에 아무런 대비도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 기온은 전날에 비해 심하게 낮아졌다. 두 사람은 비가 들어오지 않는 한쪽 구석으로 가 앉아있었다. 가진 옷가지를 죄다 뒤집어 써도 몸이 떨렸다. 혁재보단 동해가 그 정도가 심했다.

 

혁재는 동해의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뜨거웠다. 축 널부러져 있는 동해에게 혁재는 가방 깊숙이 쑤셔놓았던 약을 먹였다. 손을 떨면서 먹인 탓에 동해의 입가에 물이 묻었다. 혁재는 새파래진 낯빛으로 얼굴을 닦았다. 동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비는 며칠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고 동해의 상태도 나아지지 않았다. 동해는 사경을 해맸다. 와중에도 드문드문 혁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눈물로 퉁퉁 붓고 벌개진 눈가. 동해는 혁재의 그 얼굴을 자신이 보고싶었던 얼굴이라 생각했다. 이 고양감이 열에 의한 건지 아님 무엇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동해의 열이 그나마 가라앉은 밤, 혁재는 자는 동해의 손을 잡고 고해성사 하듯 말했다.

“사실 나 경기도로 가지 않아. 그냥 너랑 같이 가고 싶어서 그렇게 말했던 거야. 몇 년 동안 너무 외로워서ÿ 너무 외로워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 그렇게 되고 만난 사람들은 전부 내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ÿ.”

혁재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너랑 다시 만나서 너무 좋고 설레서ÿ”

혁재의 말이 끝나기 전 혁재와 동해의 눈이 순간 마주쳤다. 동해는 느린 움직임으로 혁재의 손에 깍지를 끼고 다시 눈을 감았다. 혁재는 그 손깍지를 풀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동해가 눈을 떴을 때 혁재는 동해의 옆에 누워있었다. 동해는 혁재를 멍하니 쳐다보다 혁재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안정이 필요했다. 앞으로 갈길이 머니까.

 

원래 단순하게 생각하며 살았다. 복잡한 건 싫었고, 굳이 머리 아프기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복잡하게 생각하더라도 동해는 혁재와 앞으로도 함께 가고 싶었다.

친구이자, 가족이자, 연인이 되고 싶었다. 둘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연인이 아니더라도 친구이자 가족으로, 친구가 될 수 없더라고 서로 지탱해줄 가족이 되어 안식처이자 이정표가 되었음 했다. 운석이 떨어지기 이전의 하늘에서 빛나는 북극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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