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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후변화

Blessing

솜사탕 같은 구름이 높은 하늘을 이따금 물들이는 계절. 봄이었다. 그제는 봄비가 한바탕 쏟아졌다. 톡, 톡. 수업 시간은 끝을 향해 달려가는데 창문을 부딪는 빗소리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른하늘에 소나기라는 말은 이럴 때나 쓰는 걸까. 하늘은 예고 없는 비를 뿌려대는 주제에 시침을 떼고 한없이 맑았다. 꼭 이혁재 같다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이혁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그나마, 그러니까 정말 자존심이 상하지만, 동해 다음으로 이혁재랑 친한 놈에게 접근해서 물었다.

 

이혁재 야자 한대?

 

어. 오늘 학원 보강 취소됐다던데.

 

고맙다고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에 자연 힘이 실렸다. 정보를 캐내러 간 주제에, 막상 남의 입을 통해 이혁재의 얘기를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 않은 탓이었다. 집에 있는 형을 닦달해 학교까지 우산을 가져오게 했다. 두 개를 가져오라 하면 될 것을 굳이 커다란 우산 하나만 받아낸 이유야 뻔했다. 비 때문에 집에 가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이혁재 뒤에 나타나서, 자연스럽게 팔을 잡아끌고, 같은 우산 아래서 정답게 집까지 걸어가다 보면….

 

그러나 이혁재는 딴 놈의 우산을 나누어 쓰고는 홀라당 집으로 가버렸다.

 

까만색 장우산을 들고 복도에 우두커니 서있는 이동해를 모두가 힐끔대며 지나갔다. 왜 그러고 있냐고, 집에 안 가냐고, 집에 같이 가자고 하는 애들이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속에라도 들어간 듯 귀가 먹먹했다. 그렇게나 충격적인 일이었을까. 혼자 딴 세상에라도 떨어진 것처럼 말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학교에 저뿐이었다. 이혁재가 이동해를 버려두고 먼저 갔다. 커다란 우산에 담긴 의도를 빤히 읽고서도.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육지로 끌려 나온 듯 온갖 감각이 생생하게 동해를 덮쳤다. 귀를 때리는 빗소리. 코밑을 감도는 습한 비 내음. 손이 하얘지도록 꽉 쥐고 있던 우산 손잡이의 매끄러운 감촉. 허해진 속.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추위. 이동해는 그날 턱이 비틀리도록 이를 악물고 집으로 갔다. 혼자서.

 

우산을 쓰지 않은 탓에 다음날 심하게 몸을 앓았다. 펄펄 끓는 열로 불구덩이에 들어간 것마냥 괴로우면서도, 동해는 손에서 폰을 놓지 않았다. 분명 제 자리가 비어있을 텐데. 동해의 안부를 묻는 말을 수도 없이 받았을 텐데. 그런데도 대답 한마디 못 했을 텐데. 이혁재 너는 그게 아무렇지 않은지. 그래서 이렇게 연락 한 통 없는 건지. 하루를 종일 앓고 멀끔하게 회복한 이동해한테 남은 건 오기뿐이었다. 학교에 가자마자 자리를 바꿨다. 이혁재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고민한다. 당장이라도 눈을 똑바로 맞추고 묻고 싶었다.

 

 

대체 뭐가 문제냐고.

 

타는 속에 얼음물만 들이켰다. 이혁재가 동해를 무시한 지 일주일째였다. 그놈의 한 떨기 꽃잎이 대체 뭐라고. 까드득,까드득. 이동해는 단단한 이 사이로 얼음을 부수며 회상에 잠겼다. 이글대는 시선은 반듯한 뒤통수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다. 뭐 그렇게 재밌는 일이 있다고,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을 때마다 동그란 머리통을 감싸고 있는 머리카락들이 나풀나풀 휘날린다. 마치 그때의 꽃잎처럼.

 

때는 주말이었고 중간고사를 앞둔 시험 기간이었다. 시험 기간이 되면 으레 그렇듯 혁재네 집에서 머리를 맞대고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날은 도저히 집중되지 않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다 타는 이동해가 따스한 햇볕 아래 벚꽃잎이 살랑살랑 휘날리는 주말,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꽃놀이를 가자는 제안은 당연히 거절당했다. 제일 친한 친구가 전교 1등이라는 사실은 이럴 때 꽤 방해된다. 그리하여 나가기 싫다는 이혁재를 조르고 졸라 합의를 본 게 구립도서관이었다. 산책로를 통해서 가면 놀러 가는 느낌도 낼 수 있고, 도서관 쉼터 벤치에는 커다란 벚나무도 몇 그루 심겨 있었으니까.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다리를 달달 떨며 겨우 집중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빵으로 점심을 때운다던 혁재를 질질 끌고 지하 식당까지 내려가 배부르게 밥을 먹였다. 바로 자리에 앉으면 소화가 안 된다는 핑계를 들먹이며 도서관 뒤편 한적한 공원까지 혁재를 데려온 차. 기다란 벤치를 둘이 차지하고 앉아 봄바람을 맞았다.

 

"좋다."

 

"나오길 잘했지? 내 말 들어서 안 좋은 거 없다니까."

 

"그것까진 너무 나갔고."

 

배부른 고양이처럼 늘어져 있는 주제에 괜히 튕긴다. 어깨를 잡아당기자 가벼운 몸뚱아리가 풀썩, 동해의 무릎으로 엎어진다. 무릎을 베고 눕게 했다. 뭐하냐며 눈을 휘둥그레 뜨는 걸 무시하고 손바닥으로 혁재의 시야를 가렸다. 살갗에 닿는 속눈썹의 감촉이 간질거린다. 너무 힘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며 반대쪽 손으로 혁재의 머리칼 사이를 파고들어 살살 쓸어내렸다. 이따금 마사지라도 하듯 두피를 꾹꾹 눌러주면서. 뒷목이 시작되는 부분을 꾸욱 누르자 '아' 하는 소리를 낸다. 많이 뭉쳐있던 건지 아픈 듯 몸을 뒤틀면서도 동해의 손길에 가만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너는 참 감기는 맛이 있다고, 그런 말을 하면 화내겠지. 버럭 하는 것도 꽤 귀엽기는 한데. 상상만으로도 혀 밑에 달큰한 침이 고였다. 혓바닥으로 볼 안쪽을 누르며 괜히 딴소리를 했다.

 

 

"너 여기 잘 뭉치니까 좀 풀어주라고 했지."

 

"귀찮아."

 

"나중에 더 아파진다니까."

 

"네가 풀어주면 되잖아."

 

…말이나 못 하면. 타박하듯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아! 야, 아파! 허공에 울리는 새된 소리가 밉지 않았다. 목 주변을 엄지로 동그랗게 문지르며 달래주자 또 금방 몸에 힘을 뺀다. 이럴 때 보면 꼭 손을 타는 작은 동물 같았다. 그럼 이동해가 주인인가. 바람 빠지듯 웃으며 실없는 생각을 날려 보냈다.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다. 마른 어깨를 토닥토닥 이며 진심을 흘린다. 허공에 떠다니는 기운마저 따스한 날이었다.

 

"좀 쉬어. 너 일주일 동안 하루에 네 시간도 안 잤어."

 

"…시험 끝날 때까지만 버티면 되지 뭐."

 

내용은 의연했으나 목소리에는 피곤한 기색이 한가득 배어 있었다. 고집을 꺾지 않을 이혁재를 알기에 짧게 혀를 차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알겠으니까 조금이라도 자두라고 일렀다. 손에 감기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꽤나 부드러웠다. 같은 사내놈의 머리칼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러고 보니…. 둥그런 이마를 내려다보던 동해의 눈썹이 까딱, 치솟는다. 혁재의 얼굴 절반을 덮고 있던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가, 빼곡하게 돋아난 속눈썹에 그만 시선을 빼앗겼다. 봄 내음을 매달고 무겁게 가라앉은 선들을. 피곤함에 평소보다 날카롭게 벼려진 뺨을. 그럼에도 동해에게는 한없이 순해 보이기만 하는 이혁재를. 그러고 보면 이혁재는 또래 놈들과 비교했을 때 훨씬 곱상한 외모였다. 이혁재의 몸에 돋은 모든 털이 그러하듯, 색이 옅은 눈썹부터 나긋하게 휘어진 눈매까지 꼼꼼히 훑고 있는데 칭얼대는 목소리가 감상을 방해했다.

 

"눈부셔, 좀 쉬라며."

 

"그래. 그래."

 

애라도 달래듯 오구오구 해주니 솜방망이 같은 주먹이 옆구리를 퍽 찔렀다. 과장되게 아픈 척을 하다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봄볕 부스러기 따위는 이혁재의 잠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다시 눈을 덮어주었다. 나비의 날갯짓 같은 속눈썹이 사륵, 사르륵 손바닥의 여린 살을 간지럽히고. 자그마한 얼굴 아래로 보이는 것은 아이처럼 유약해 보이는 턱과… 입술. 먹이를 조르는 새 부리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입술에서 이상하게 눈을 못 떼고 있을 때였다.

 

팔랑-

 

벤치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던 벚나무에서 꽃잎이 하나 떨어졌다. 그것도 이혁재의 입술 바로 밑에. 턱과 입술 사이의 옴폭 들어간 부분에 절묘하게 안착한 꽃잎이 꽤 잘 어울렸다…. 얘는 뭐 이런 것도 잘어울리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괜히 인상을 구기는데 오물거리는 입술이 시선을 확 잡아챘다.

 

 

 

"야. 이거 뭐야?"

 

"꽃잎."

 

"꽃잎?"

 

"응. 벚꽃."

 

"뭘 보고만 있어. 떼줘."

 

이동해의 손을 타는 게 자연스러운 이혁재. 가볍게 웃으면서 손으로 꽃잎을 들어내고, 참 잘 어울렸었는데 아쉽다는 실없는 생각도 한번 해주고, 또 분위기가 뭔가 그래서….

 

"……."

 

"……."

 

"…뭐야?"

 

"입술."

 

"…뭐?"

 

"뽀뽀했는데."

 

동해는 혀로 제 아랫입술을 한번 쓸었다. 금방 사라진 말캉한 감촉이 못내 아쉽다. 이혁재는 부드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귓불을 만지작댔다. 역시 아쉽다. 한 번 더 고개를 숙이려는데, 그때까지 제 얼굴을 반쯤 덮고 있던 손을 치워낸 혁재가 눈을 번쩍 떴다.

 

"너, 너. 미쳤냐?"

 

"미치긴."

 

"근데, 씨, 뽀뽀를 왜 해!"

 

얼굴에 울긋불긋 꽃물이 들어있었다. 발개진 목덜미와 귓바퀴에 한 번씩 눈길을 주고 이혁재와 시선을 맞췄다.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 넘실대는 동요를 보니 아랫배가 찌릿찌릿했다. 기묘하게 피어오르는 만족감을 모르는 척 억누르고, 입을 맞추려다 또 한 번 가로막혔다. 씹, 뭐 하는 거냐고 대체! 평소에는 입에 담지도 않던 쌍시옷 발음을 입에 올릴 정도로 당황했나보다. 이게 그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싶었다. 동해의 고개가 의아함을 담고 옆으로 까딱, 기울었다.

 

"분위기가 그랬잖아."

 

"…뭐라고?"

 

"뽀뽀할 분위기였다고."

 

찰나였다. 분홍빛 벚꽃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예쁘게 물들었던 얼굴에서 순식간에 색이 빠져나간 건. 동해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바라보며 숨을 참았다. 이거 이혁재가 엄청 화났을 때 나오는 반응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잠깐. 아니나 다를까 벤치에서 일어난 이혁재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동해를 내려다보았다. 분위기가, 너는 분위기 따위로, 고작…,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자꾸 멈춘다. 달싹이는 입술이 애탔고 끝내 목구멍으로 다시 돌아간 언어가 궁금했다. 잠자코 눈을 맞췄다. 연갈색 눈동자가 빛을 품고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참 예쁘게도 반짝인다. 그런데도 어딘지 서글퍼 보이는 표정에 입이 말랐다. 왜그러냐고, 앉아서 얘기하자고, 끌어당기려던 손이 내쳐졌다. 애간장을 녹일 대로 녹이다 뱉어낸 말은 그리 좋은 뜻이 아니었다.

 

"개새끼."

 

"뭐?"

 

혁재야, 그런 나쁜말 하면 못 써…라고 평소처럼 농을 던지기도 전에 멀어지는 뒷모습. 가느다란 실루엣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동해는 눈을 깜빡일 수 있었다. 깜빡, 깜빡, 깜빡. 길게 돋아난 속눈썹이 올라갈 때마다 맑은 눈동자는 색을 잃어갔다. 콧속이 간질거렸다. 마치 혁재의 속눈썹이 그랬던 것처럼. 동해는 제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다. 벤치에 늘어지며 고개를 기댄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지만 아무런 냄새도 향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 손바닥에는 이혁재의 잔향이 남지 않는 걸까. 습윤해진 눈가를 꾹 누르며 아쉬워한다. 한줄기 봄바람 같은 헛웃음이 픽 터졌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뒤따르는 재채기.

 

동해는 꽃가루 알레르기가 심했다.

© 2021 HaeEun Collab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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