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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토피아

됴리

디즈니영화 주토피아를 참고했습니다:D

토끼경찰관 주디홉스와 사기꾼 여우 닉은 사겼고 결국엔 결혼까지 했겠죠? 아, 둘은 우정이라구요? 해은 안 사겨요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건 그렇고, 주디에게 많은 동생들이 있던 걸 기억하시나요? 그 중 막내 동생이름이 혁재라던데?

 

“아이고오- 알겠다고요- 웅웅. 창문 앞에 길쭉한 거-는 월요일 수요일 물 두 번, 짤뚱한 건 목요일, 목요일 맞나? 하여가에 한번 맞지?”

쫑긋하게 솟은 커다란 귀, 그에 비해서 과하게 작은 에어팟이 존재감을 뽐내며 꽂혀있는 모습이 어쩐지 우스운, 작고 뽀뚱해보이는 토끼가 꼼지락거리며 창문 커튼을 젖혔다.

“근데 누나는 주토피아에 이런 집을 어떻게 구했대?”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상대의 목소리가 에어팟을 통해 흘러나왔다. 얼마나 까랑까랑하고 큰 목소리인지 듣고 있던 한쪽 귀가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아, 쫌- 동생이 물어볼 수도 있지! 헛바람은 아니거든? 주디는 무슨 주둥아리야 주둥아리.”

닉네임 ‘주디’, 가족끼리 부르는 이름은 소라. 지금 이 작은 토끼와 통화를 하고 있는 상대는 나름 주토피아 내 유명인사 주디였다. 그리고 이 작은 토끼는…

“저는 이혁재, 닉네임은 제리예요!”

 

오늘도 사랑이 넘치는 이곳, 차별이 없는 바로 이 곳. 알고 보면 수인들의 천국.

주토피아, 아니지 행토피아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 ♥ ♥

 

“하여간 잔소리.”

통화를 끝낸 혁재는 반만 열린 커튼을 마저 젖히곤 창문까지 열어 환기를 시작했다. 서툴러도 제법 야무진 모양새가 깊숙한 내면에 그동안의 누나의 가르침이 스며든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친구다 뭐다 끝까지 부인하는 꼴이 우습게 결국 그 난리를 치며 결혼을 하더니, 3년 만에 이런 좋은 집을 구한 누나와 매형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는 안 낼 거지만 말이야. 아닌 척하지만 혁재는 아직은 매형 앞에서 낯을 가리는 다 큰 척했지만 어린 토끼였다.

처음엔 결혼을 여우랑 한다니 충격이었지… 그… 친구랑 결혼은 다른 문제잖아? 충분히 충격 받을만했다고 난. 어린 토끼가 뭘 알아. 혁재는 본인을 다 컸다든가, 아직 어리다든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게 써먹는 앙큼한 구석도 있었다.

집으로 인사드리러 온 여우아저씨 눈빛이 너무 끈적해서 무서웠단 말이야. 물론 그 말빨에 30분 만에 홀랑 넘어가 버렸지만. 하, 아주 전생 같은 과거구나 과거야. 그때 좋았지 어렸던 나. -지금 혁토끼의 나이는 19로 여전히 어리다-

 

그나저나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일했다더니 대단은 하단 말이야. 뭐 결국엔 청약에 당첨되는 단게를 거쳐 이 집을 구한 거지만. 당첨되어도 당장 계약금이 없으면 못 들어왔었을 테니까? 이 워커홀릭 부부는 계약금을 마련하고 집을 안정적으로 정리하고 나서야 신혼여행을 갔다. 그래 아무래도 안정감이 있어야 여행도 즐기…

“이런 현실적인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낭만 다 어디 갔어 이혁재. 아직 넌 19살이라고.”

위로 쫑긋 솟은 귀를 양손으로 쭉 잡아내려 한번 펴준 혁재는 정신 차리자며 괜히 스스로에게 기합을 넣었다. 그래, 아직 꿈과 열정 그리고 낭만이 가득한 토끼라고 나는.

비록 지금은 늦은 신혼여행을 가버린 누나네 집이나 봐주는 신세지만 말이야.

 

제법 큰 규모의 오디션이 열린다기에 겁도 없이 기차에 몸은 실은 혁재였다. 굳이 따지자면 가출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정말 대책없이 기차에 오른 것은 아니었고, 애써서 찍은 영상으로 비디오 오디션에 통과 했다는 명분이 있으니 나름의 ‘출가’ 아니겠어? 스스로와 타협하며 멋진 어른 토끼로 성장하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이던 혁재는 기지개를 피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행토피아로 향하는 기차는 생각보다도 더 넓었고 커다란 의자는 아늑해서 괜히 기분이 더 좋았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면 행토피아에 도착하겟지?

 

물론 도착과 동시에 바로 꼬리가 잡혀버렸다. 지금은 어쭙잖은 숙소를 잡아서 갈 바엔 지금 비어있는 누나네 집이나 지키고 있으라는 명을 받은 상태였다.

사실 혁재는 알고 있었다. 방금 식물들 좀 잘 돌보라며 걸려온 잔소리 가득한 전화도 결국엔 동생인 혁재가 걱정되어서 핑곗거리를 만들어 건 전화라는 걸. 매형은 굶지 말고 티비 밑 서랍장 두 번째 칸에서 돈도 꺼내쓰라고 했는걸. 하여간 누구 누나, 누구 매형 아니랄까봐 다정한 동물들이라니까. 근데 저거 매형 비상금인가?

“오늘 저녁은 든든하게 햄스터세프의 욕쟁이 샤인머스켓무침 사다 먹어야징.”

뭐 사실 알 바 아니었다. 매형, 내가 많이 좋아해. 아직 어색하지만 말이야!

 

집 청소를 대충 끝낸 혁재는 찜해놨던 샤인머스켓무침을 사러 나갔다. 배달료가 아까웠고, 대도시의 공기도 좀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살던 동네에 비해서 과하게 반짝거리는 네온사인,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 어디선가 들리는 쿵쿵 음악 베이스. 이 모든 것이 설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서 춤추고 노래를 할 나. 스스로를 그 안에 넣어 상상하니 더욱더 벅찼다. 주인공, 이곳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그래도 여기에 너무 홀려있으면 안 되지. 혁재는 보기보다 현명한 토끼였다. 컨디션 조절을 할 줄 알았고, 당장의 유희보다는 먼 미래를 생각하는 편이었다. 오늘은 이 정도만 구경하고 집으로 가자. 앙증맞은 두 손에 들린 테이크아웃 포장지가 달랑거렸다.

“잘 먹겠습니다!”

든든히 먹고 잘 참이었다. 내일이 당장 가젤의 콘서트였다. 진짜 일생의 운을 다 쏟아 부어 어렵게 구한 vip석. 단순히 가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자리여서 설레는 것이 아니었다. 컨디션까지 조절할 정도로 공을 들이는 이유는 그 자리가 공공연하게 선택받은 자리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가젤이 중간에 독무를 추다가 손을 뻗으면 같이 올라가 춤을 출 수 있는, 그러기에 다들 쉽게 가지 못하면서도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그런 자리였다.

 

일단 혁재의 목표는 가젤의 눈에 들기! 왜냐, 가젤이 그 오디션의 심사위원이니까. 제법 구체적이고 허황된 꿈이 있었다. 가수가 될 거야.

오디션에 붙었다는 소식의 게획을 듣고 혁재를 돕고 싶은 반 친구 모두가 매달려 겨우 한자리 얻은 게 바로 한 달 전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혁재는 이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실제로 그 자리가 그대로 데뷔로 이어진 재규어도 있었고 어떤 자영업자 펭귄은 잘 추지 못했음에도 묘한 춤사위로 유명인사가 되어 업장이 대박이 났었다.

그게 내가 되지 말란 법도 없잖아?

 

“으아아 정신 차리자.”

밤새 무슨 정신이었을까. 지쳐 쓰러지듯이 잠에 들었다. 긴장이라고는 모르는 토끼인 줄 알았는데 괜한 걱정에 밤을 꼴딱 지새운 혁재였다. 가젤누나 앞에서 미끄러지면 어쩌지. 호응이 하나도 없으면 어쩌지. 호랑이 형아들 무섭겠다 등 떠오르는 모른 생각이 뒤죽박죽, 그냥 정신머리가 하나 없었다.

그런 정신으론 길을 찾아가기도 쉽지 않았다. 어젯밤에도 느꼈지만, 이곳은 혁재가 나고 자란 동네에 비해서 너무 시끄럽고 복잡한 도시였다. 다들 바빠 보여 길을 묻기도 머쓱해 괜히 서러울 지경이었다.

 

이런 저런 역경에 하마터면 정반대의 방향에서 내릴 뻔한 혁재는 남몰래 커다란 귀를 쓸어내렸다. 평소 같으면 쫑긋 서 있어야 할 두 귀가 어쩐지 좀 쳐져 보였다.

잘할 수 있을까, 여긴 너무 큰데 나처럼 작은 토끼가 눈에 보이기나 할까… 어제의 토끼와는 영 다른 모습의 토끼였다. 축 처진 두 귀와 시무룩해진 촉촉하고 발그레한 코, 톡 치면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 도통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혁재는 나아갔다. 그래도 해봐야지. 그래, 망해도 해보고 나서 망하자.

 

♥ ♥ ♥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쓸데없는 걱정들은 모두 날아갔다. 아무래도 무대체질인가 보지?

혁재가 설계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가젤은 혁재를 포함한 4마리의 수인에게 손짓했다. 다들 그 자리에 올 때부터 각오는 한 듯 쑥스러워하긴 했으나 빼는 동물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혁재만큼 날아다니는 동물도 없었다. 아, 매가 한 마리 있긴 했지만 그 ‘날아다닌다’가 그 ‘날아다닌다’를 뜻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가장 작은 주제에 역설적이게도 그 존재감은 태산이었다. 무대의 주인공인 가젤도 그 점이 맘에 들었는지 혁재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기까지 했다. 그 이후로는 공연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눈에 띄는 것에 성공한 혁재였다.

 

사실 격렬했던 그 순간 뒤로는 혁재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온 공연이었지만 사실 그저 우상인 가젤의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무대를 제 집마냥 거니는 가젤의 모습은 인간이라기엔 너무 신비로웠고 동물이라기엔 너무 가벼웠다.

마지막 곡의 리듬이 잔잔하게 흘러 여운을 남겼다. 본인도 만족스러웠던 공연이었는지 가젤의 눈가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렇게 제법 즉흥적으로 보이는 마무리 인사까지 다 하고 나자, 누군가에겐 길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짧았던 공연이 끝이 났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자마자 벌벌 떨면서 누군가와 함께 그 무대 안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작은 토끼가 있었다.

그래 맞아. 제리지. 누구겠어. 공연이 끝나고 터졌던 폭죽의 잔향을 맡고 있던 혁재에게 덩치가 큰 코뿔소 두 마리가 다가왔더랬다. 순간이 아쉬워 머뭇거렸던 건데, 그 순간 혁재는 본인의 머뭇거림을 후회했다. 왜 나를 데리러 왔을까, 내가 무슨 실수를 했을까. 뭘까. 이러한 생각으로 가득 차버리니 표정관리도 잘 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따라간 그곳엔 가젤이 있었다.

“애기 반가워!”

“힉.”

정말 바로 앞까지 얼굴을 가져다 대며 밝게 인사하는 그 모습은 현실감이 떨어졌다. 여기까진 시뮬레이션에 없었는데 하며 혁재의 동그란 눈이 당혹감으로 가득 찼다. 아무리 당돌하고 치기 어린 토끼여도 이 상황은 좀 그렇잖아. 진짜 너무 갑작스럽잖아.

“ㄴ,누나 팬이에요. 저도 머, 멋진 가수가 되, 되고 싶어요. 조만간 그 오디션도 보거든요…”

“흐음?”

겨우겨우 용기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맴도는 순간의 정적. 영문도 모른 채로 적막 안에 갇힌 혁재는 눈만 굴렸다.

사정없이 구르는 눈동자는 언제라도 톡 굴러 데굴 굴러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뭐지 이 분위기, 침도 못 삼킬 정도였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건 조금은 경박스러운 웃음소리였다.

“그래 나처럼 멋진 가수가 되고 싶다구 애기토끼? 충분히 가능하지 당연한 말을 하고 그래!”

“진짜요? 헤…”

“누나는 아니지만 말이야. 형이어도 멋있지?” (*영화상에서 슈퍼스타 가젤은 크로스드레서였다.)

“네?”

“형 그만해. 들어볼 것도 없어. 빨리 내보내.”

알 수 없는 가젤의 말에 혁재가 표정관리도 못 하고 놀라버리자 무언가 언짢은 듯 앉아있던 호랑이가 일어나 다가왔다. 그리고는 가젤에게 고갯짓을 했다. 다른 곳으로 가자는 의미의 고개짓. 혁재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아, 내가 실수했구나. 지금 어마어마한 실수를 했구나.

“불순한 의도인가. 팬도 아니고.”

아무래도 호랑이에게 오해를 산 것 같았다. 아니, 그게 뭐 당연히 핑계고 변명의 여지는 없었지만 그래도 억울하긴 했다. 혁재네 동네는 진짜 블루베리 농사나 짓는 저 멀리 시골 마을이라 딱히 미디어에 노출될 시간이 없었다니깐. 그냥 CD 한 장 사서 나눠듣고, 뮤직비디오 녹화한 거나 끈이 늘어지게 본 게 다라니까. 아니 진짜라니깐? 세상이 모두 행토피아처럼 도시처럼 되어있지 않아요 이 사람, 동물들아.

 

혁재는 미안하면서도 억울했다. 하지만 호랑이가 화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본인이 생각 없이 저지른 실수가 엄청난 상처가 다가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커다란 두 귀가 축 처져서 바닥에 닿을 듯 시무룩해졌다. 하얗게 빛나던 털 결도 어쩐지 칙칙한 먼지 색이 도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을 또 환기하는 건 가젤, 모두의 슈퍼스타였다. 자연스럽게 호랑이와 혁재의 사이로 들어와 본인의 뒤로 혁재를 살짝 숨겨주었다. 그리고는 호랑이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따뜻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호랑이가 더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넌 너무 앞서 생각해. 애기가 모를 수도 있지.”

혁재는 그 사이에서 눈만 꿈벅거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무리 눈치 빠른 혁재일지라도 지금은 상황파악이 힘들었다.

“일단 오늘은 놀랐을 테니까. 흠, 오디션 온다고 했지? 그때 볼까 우리?”

“네,넵…”

“이름이 뭐야 토끼는? 내 이름은 재우.”

“제ㄹ…아니, 혁재요!”

 

쫒기 듯 나온 혁재의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큰일 났어, 괜한 짓을 해서 기회를 뻥 차버렸어.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가젤에게 너무 미안했다. 본인이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줬을지도 모를 본인의 우상에게 너무나도 사과하고 싶었다. 이름도 알려준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렇지만 이미 찍혔겠지 그럴 거야 아마… 가젤 옆에서 눈이 찢어져라 째려보던 그 호랑이의 안광이 자꾸 떠올랐다. 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눈빛이 뜨거웠다. 아무리 이제는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서로 어우러져 평화롭게 살아간다지만, 그래도 호랑이는 호랑이였다. 그 안광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그 시각, 가젤과 함께 밥을 먹던 호랑이, 동해는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투덜대고 있었다.

“나 쟤 싫어 ”

“왜 또 그래 동해야.”

“짜증 나잖아.”

“짜증 낼 시간에 이거나 좀 먹어봐.”

기세에 비해서 어린 말투와 어린 표정, 재우는 그런 동해의 투정 아닌 투정을 받아주고 있었다.

동해는 여전히 입을 삐죽이면서도 재우가 집어준 가공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맛은 맘에 들었는지 굳었던 표정이 미세하게 풀어졌다.

“넌 너무 딱딱하게 굴어. 스스로한테 유해져 봐.”

“이게 나야.”

“글쎄?”

“형이나 무르게 굴지 마.”

다시 굳어버린 표정이었다.

 

♥ ♥ ♥

 

“참가, 가 번호 404번. 사, 랑에 사랑을 더…한 제리입니다. 추, 춤과 노래 준비 했, 습니다.”

“그래요. 보여주기에 앞서서 할 말이라든지 결심 같은 거 있어요?”

분명 연습할 때는 한 번도 더듬지 않았다. 이게 다 망할 저 호랑이 때문이었다. 재우 뒤에 서서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혁재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꼭 들리는 듯했다. ‘너 한마디라도 실수해봐.’ 혁재의 보들한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포, 포부도 포부지만 제가 편지를 준비했습니다…!”

“특이하네요. 편지?”

“네, 나중에 꼭 읽어주세요! 제가 오디션에 떨어지더라도…! 꼭 읽어주세요!”

재우가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비웃는다거나의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눈앞의 바들바들 떨고 있는 토끼가 안쓰럽기도, 귀엽기도 해서 난 자연스럽고 따뜻한 웃음이었다.

“팬레터인가?”

“비슷합니다. 그리고 반ㅅ,반성문도 포함입니다.”

아, 전 문장은 하나도 안 더듬고 잘했는데. 반성문이라는 단어에 괜히 혼자 또 민망해져서 더듬어버린 작은 토끼는 귀엽게 폭- 튀어나온 앞니로 아랫입술을 씹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말려서 춤 한번 못 추겠구나 싶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고개를 세게 두어 번 털더니 기합을 넣었다.

“보여드리겠습니다!”

가젤은 기합소리에 웃으며 노래를 재생시켰고, 혁재는 춤을 시작했다. 그래, 떨어질 땐 떨어지더라도 보여줄 건 보여줘야지. 나 진짜 잘한다고. 주눅이 들어있었던 작은 토끼, 혁재의 눈빛이 또 변했다.

 

♥ ♥ ♥

 

“안녕하세요! 새로 들어온 연습생 제리입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혁재는 재우가 속한 소속사의 연습생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젤 1호 연습생. 재우가 프로듀싱 할 첫 가수가 될 아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제리, 잘해보자.”

“그때 봤어요. 잘하던데?”

“나는 빅터. 백호랑이야. 제리라고 했지?”

연습실에 있는 자들은 혁재를 따뜻하게 맞아줬다. 재우가 오랜 시간 함께했다던 뼈 굵은 댄서팀의 단장도, 소속사에 속한 여러 연예동물들도. 딱 한 명만 빼고.

그때 그 호랑이였다.

 

동해는 진짜 혁재가 싫었는지 혁재가 있을 땐 꼬리 하나 보여주지 않았다. 수인들은 편한 상태에선 꼬리와 귀를 빼놓고 있곤 했다. 완전한 인간화는 수인 세계에선 나름의 격식이고 벽이었다.

그런 점을 혁재도 모를 리가 없는데 동해는 너무 티가 나게 행동했다. 방금까지 분명 꼬리를 내놓고 있었는데 혁재가 들어오자마자 스윽 없앤다든지, 혁재가 인사를 하면 갑자기 귀를 숨기곤 바로 일어나 자리를 피한다든지.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그래 싫어할 수 있지. 그래 그럴 수 있어. 근데 저렇게까지 티 낼 일이야? 어른 호랑이 맞아? 애새끼 아냐?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넘기던 혁재도 반복되니 짜증이 올라왔다. 나름 토끼 마을 파이터, 당근밭 꼬라지로 이름 좀 날렸던 혁재였다.

 

점심으로 맛대가리 없는 미니당근을 씹고 있던 혁재는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구석, 스피커 근처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호랑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닿지도 않는 가슴팍에 폴짝거리며 멱살을 잡는 시늉을 했다.

“저랑 이야기 좀 해요!”

“너랑 할 이야기 없는데.”

“아 좀 하자고!”

혁재는 방금은 좀 오바였다는 듯 곧게 올렸던 두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런 혁재를 보는 호랑이의 눈빛이 묘했다.

“…”

“그럼 앞으로 귀찮게 안 할게 하자 좀!”

“…반말 하지 마.”

그러면서 생각보다는 순순히 따라오는 동해였다. 여전히 귀도 꼬리도 보이지 않았고, 표정도 무섭게 굳어있었지만.

 

혁재는 팔짱까지 끼고 뒷다리… 아니 그냥 한쪽 발을 쿵쿵거렸다. 그리고 바로 맞은편에는 호랑이가 멀뚱하게 서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혁재는 한 번 더 한숨을 푹하고 내쉬더니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제법 깊은 곳에서부터 꽁해 있던 말인지라 떨리지도 않고 또박또박 내뱉어졌다.

“저한테 진짜 왜 그래요?”

“내가 뭐.”

“아 그쪽이 자꾸 반말하면 저도 할 거예요.”

“내가 뭐요.”

짜증나. 그 와중에 반말 듣기는 또 싫은가 보지? 혁재의 이마에 빠직하고 핏줄이 올라왔다.

“아니 제가 뭐 그렇게 맘에 안 드시냐구요.”

“편견 가득한 눈빛, 그저 제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물불 안 가리고 남에게 상처 주는 짓도 서슴없이 하는 점. 이 정도요.”

“어이없네?”

 

혁재 못지않게 호랑이에게도 그때 쌓인 오해가 아마 아직까지도 앙금으로 똘똘 뭉쳐져 남아있는 것 같았다. 아니 또라인가 진짜. 이미 재우도 진심만이 담긴 절절한 편지를 보고 머리까지 쓰다듬어준 지 오래였다. 그리고 열심히 하는 모습에 혁재를 모두가 이뻐했다.

진짜 이놈의 쪼잔한 호랑이 빼고. 진짜 진짜 이동해 빼고. 애초에 이놈의 쫌생이 호랑이는 혁재의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연습을 보려고도 하지 않으니 혁재가 어떤 아이인지 몰랐다. 그냥 잘못된 첫인상 그거 하나였다.

 

빠직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눈앞에 작은 토끼가 꽤나 위협적인 표정을 지어내 호랑이의 코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니 편견은 그쪽이 더 가득한 거 아니에요?”

“…”

“나 연습하는 거 한 번이라도 봤어요? 나랑 대화 한번이라도 해봤어요? 내가 왜 재우 형한테 실수했는지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사과를 했는지 뭐 하나라도 아는 거 있냐구요.”

혁재는 숨도 안 쉬고 말을 뱉었다. 얼마나 억울했는데, 진짜 얼마나 서러웠는지 아느냐고. 가젤에게 주는 편지를 쓰면서 휴지를 반 통이나 썼다 우느라고. 정말 미안했고, 그러나 무슨 나쁜 의도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정말 몰랐다. 몰랐고 진짜 몰랐다.

편견? 그런 건 없었다. 그냥 형이구나 그럼 이제 형이라고 불러야지 그게 다였다. 근데 무슨 포비아토끼 보듯이 보는 저 눈빛이 맘에 안 들었다. 아니 그냥 저 호랑이 새끼 초식동물 싫어하는 거 아냐? 아 그건 아니지 재우형도 초식동물인데… 뭐 하여간!

“하나만 봐ㄷ…”

“그리고 내가 편견은 무슨, 아 우리 누나가 여우랑 결혼할 때도 아무 생각도 안 했거든???? 내가 얼마나 열린 토끼인데 어??? 나 진짜 억울해요. 편견은 그쪽이 있는 거 아니에요? 그냥 본인이 그렇게 보면 그런 동물이야? 흑과 백으로 이루어져 있냐구요 네?”

아, 이게 아닌데. 좀 더 앞뒤가 맞는 멋진 문장으로 갈구고 싶었는데. 혁재는 아차하는 심정에 호랑이 모르게 아랫입술을 씹었다.

“…일단 결혼은 축하드리고.”

“진짜 얼척없…예?”

쌓였던 억울함이 터져 마구 말을 쏟아내는 가운데 또 동해가 어이없는 말을 했다. 지금 이 상황에 저 말이 맞나?

“미안.”

말문이 막혀버렸다. 사과를 받고는 싶었지만 이렇게 쉽게, 단시간에 받을 줄 몰랐다. 성의 없는 사과인가 싶어서 고개를 올렸더니 더 당황스러웠다. 축 처진 눈썹과 묘하게 불안해 보이는 입꼬리.

혁재의 귀가 쫑긋거렸다. 타고나기에 예민한 토끼들은 특기가 있었다. 바로 상대방의 기분과 바뀐 기류를 기민하게 알아채기. 혁재는 느끼고 있었다. 눈앞의 호랑이는 지금 진짜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ㅇ,알면 됐구요. 저도 뭐 미안은 해요. 그쪽한테 미안할 일은 아닌 것 같지만.”

“네 말대로 내가 편견 가득했던 것 같다. 아직도 이러네. 미안하다 고칠게. 아니 고칠게요 미안해요.”

아직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제법 날이 선 혁재의 말에도 동해는 반복적으로 사과해왔다. 혁재만 당황할 뿐이었다. 아니 갑자기 왜 저래.

 

♥ ♥ ♥

 

어렸던 아기호랑이 동해에게 옆집에 살던 가젤, 재우는 그야말로 우상이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아직은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에 대한 티 나지 않지만 분명한 선이 존재하던 그 시절에도, 무슨 이유에선지 유달리 육식동물이 가득한 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도 재우는 그 어떤 것도 꺼려하지 않았고, 그다지 개의치 않아 했다. 그 사이에서도 기 한 번 죽은 적이 없었고, 단상 위에 서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전교회장은 물론 댄스팀의 동아리 회장까지 맡으며 그야말로 모두의 중심에 있었다. 존재만으로도 빛나는 그 어떠한 것이었다.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그 모습, 그리고 그만큼이나 뻗어있는 곡선의 뿔. 겁이 많은 아기호랑이는 그를 보며 용기가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러나 멋모르던 시절, 매년 있던 대회에 이번에는 다른 옷을 입고 춤을 추겠다는 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상처를 내고 말았다. 동경이라는 거울에 금이 가는지도 모르고 올린 입꼬리가 참으로 철이 없었다.

“형 진짜 웃기다. 이번에도 1등 하겠는데?”

“난 이런 옷이 좋더라.”

“으 난 별로. 너무 반짝거려. 웃기려면 모르겠지만.”

나중에 사실을 알았을 때. 가젤은 본인을 증명하고 싶어서 또 한 번 도전하는 용기를 낸 것이라는 걸 듣게 되었을 때.

어린 호랑이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미 준 상처를 되돌릴 순 없겠지만 계속해서 노력하겠다며 갓 태어난 아가처럼 울어 보였다. 물론 가젤은 아무렇지 않다며 그런 호랑이를 일으켜 세웠고 그의 서툶과 어린 실수를 용서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끝없는 자괴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어린 호랑이는 그날부터 조각난 동경의 파편을 주워 또 다른 도자기를 만들어냈다.

“나 형이랑 같이 춤추고 싶어.”

“내 옆에서 춤춰서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형 멋있잖아. 내가 아는 초식, 아니지 그냥 수인 통틀어서 형이 제일 멋져.”

“그런 소리도 할 줄 아네.”

호랑이 나름의 사죄의 방법이자 그에 대한 애정이었다. 애초에 가젤을 보며 본인이 크고 싶은 무언가의 형상을 그려왔던 호랑이였다. 자신의 우상을 춤을 좋아하니 본인도 춤을 좋아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적성에 맞는 편이였다.

학교를 졸업하게 되어서 또 각자의 길을 걸을 순간은 멀지 않은 올 것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이번에도 그 길을 따라가자. 아기호랑이는 큰 듯 아주 작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애정과 동경 사이 그 어딘가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 활동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 뒤에는 재우의 타고난 스타성과 탄탄한 실력, 성실함이 있었다. 재우는 본인의 중심으로 하는 쇼를 만들어냈다. 초식동물이면서 포식자로 구성된 댄서들을 거느렸고. 그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존재감을 뽐내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아직 만연한 차별에 역으로 대응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슬아슬한 옷을 입으면서도 본인의 뿔을 감추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 그 자체에 동물들이 열광하게 만들었고, 본인의 존재가치를 증명해 나갔다.

애초에 재우는 강했다. 본인이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았을 때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해야 더 멋지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가 더 큰 고민이었다.

그래서 한편으론 본인의 옆에서 춤을 추고 있는, 이제는 다 커버린 어린 호랑이가 가끔은 안쓰러웠다. 아직까지도 본인에 대한 미안함이 있는 것 같았다. 당당했지만 주눅이 들어있었고, 재우의 관한 일이면 유달리 애처럼 굴곤 했다. 재우는 이제는 동해도 진짜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했으면 했고, 미안함이 아님 즐거움으로만 가득한 무대를 했으면 했다.

재우는 재우 나름대로 동해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다. 괜히 본인 때문에 동해가 작은 세상에 갇혀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런 고민이 계속되었고, 무언가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던 그 순간에 작은 토끼 한 마리가 나타났다.

당돌했다. 토끼란 존재는 정말로 작고 약한 존재였다. 그렇지만 타고난 에티튜드와 실력에 대한 확신. 무엇보다 눈빛이 맘에 들었다. 작은 몸을 가지고는 호랑이의 안광이 있었다. 본인의 어릴 때 모습이 보였다.

미안해하면서 당당하게, 그러나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전하는 사과의 태도가 더더욱 그러했다. 미안하다고 해서 주눅이 들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용서와 믿음에 보답에 멋지게 크겠다며 포부를 보이는 작고 하얀 토끼가 너무 맘에 들었다.

 

그리고 그 토끼가 끼칠 영향력에 오래간만에 설렘을 느꼈다. 토끼도 토끼지만 가젤 또한 영민한 촉을 가지고 있었다.

동해가 혁재를 불편해하면서도 몰래 힐끗거리며 관찰하는 모습을 보았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귀찮음, 싫음… 아주 약간의 부러움이었다. 작은 호랑이는 커다란 호랑이가 되어서도 당당한 자들에게 약했다. 당당한 척으 할 줄 알았지만, 아직도 진짜 당당함을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재우는 그런 호랑이의 눈빛에 스며든 그 부러움이라는 감정에 주목했다.

생각보다 상황이 흥미롭게 흘러갈지도 모르겠네.

 

♥ ♥ ♥

 

지금 사과를 하고 있는 동해는 꼭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재우 앞이 아닌 곳에서는 절대 짓지 않는 표정이었다. 꽤나 오래전에 했던 실수를 여전히 담고 있는 동해였다. 더 심한 실수를 했던 주제에 아닌 척 순결하게 굴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렇기에 당신이 오히려 편견이 가득한 것 아니냐는 날카로운 말에 반사적으로 나온 사과의 말은 빨랐지만 진심이었다. 창피했다. 이 작은 토끼 앞에서 무슨 추한 꼴을 보인 것인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고개를 들게 한 것도 이 작은 토끼였다.

“그, 그래도 좋은 호랑이세요. 뭐, 빠른 사과하는 그런 동물치고 피드백이 느린 동물은 못 봤거든요.”

성숙한 방법으로 누군가를 달랠 줄 아는 혁재였다. 사과를 사과로 받아들이며 상대를 배려할 줄도 알았다. 동해는 더욱더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순간 눈앞에 작고 못생겼던 털 뭉치가 뽀송하고 하얀 토끼로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가슴팍도 오지 않는 주제에 늠름하게 쫑긋거리는 두 귀가 꼭 재우의 단단한 두 뿔과 닮아 보였다.

 

♥ ♥ ♥

 

오해를 벗으니 서로의 땀방울이 보이기 시작했다. 둘을 그때부터 조금씩 말도 했다. 가끔은 동해가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연습실의 동물들은 웬일이냐 드디어 화해했냐하며 장난스럽게 둘을 놀렸지만 둘을 크게 개의치 않고 춤을 췄다. 친구가 될 준비를 느리지만 단단하게 하고 있었다.

“저… 근데 저 이 부분 알려주실 수 있어요?”

“제가요?”

“네, 여기 안무 직접 만드신 거라고 들었어요. 그… 같이 한 번만 쳐주시면 안 돼요? 월말평가 때 하고 싶어서요…”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변화가 있다면… 둘은 이제 사이가 나쁘진 않았고 인사도 나누는 사이였으나 과하게 수줍어했다. 그날의 다툼이 머쓱하게 느껴져서였을까. 남들 앞에선 잘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는 것에 대한 민망함이었을까.

동해는 머리를 긁적이며 혁재가 물어보는 안무를 따서 천천히 알려주기 시작했다. 혁재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을 바쁘게 움직였다. 쫑긋거리는 귀와 동그란 꼬리로 리듬을 탔다.

“멋있네요.”

“고마워요…”

“…”

“그, 그 저는 그 창작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멋있거든요. 저는 아직 창작까지는 잘 못하기도 하고… 뭐 무언가랑 꼭 맞서서 싸우는 것 같고 용맹한 느낌 나서 그… 안무가 좋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혁재는 아무런 대답이 없는 동해를 보며 괜히 말을 꺼냈다 두 귀를 잡아내려 눈을 가렸다. 내가 좀 더 말주변이 있거나 웃겼으면 이렇게까지 어색하진 않을 텐데 아. 괜히 본인을 탓하기까지 했다. 괜한 쓸데없는 말만 튀어나왔다.

“저, 저는 뭐 아직 우리 누나도 못 이기고 뭐…”

“고마워요. 그런 말 기뻐요.”

두 손으로 잡고 내렸던 두 뒤가 띠용- 소리를 내며 솟아올랐다. 그야말로 놀란 토끼 눈으로 혁재는 동해를 바라보았다. 동해의 머리 위에 작고 동그란 두 귀가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묘하게 발그레한 색으로 물든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순간 주위의 공기가 포근해졌다. 몸에 열이 많은 호랑이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뿜어낸 열기 같았다.

 

그리고 1시간쯤 지났을까. 동해가 알려준 포인트를 하나하나 집어가며 연습을 하고 있던 혁재에게 동해가 다가왔다. 아까처럼 귀를 내밀고 있진 않았지만, 호의적인 발걸음이었다.

“이거 먹고 해요.”

본인 손바닥만 한 미니당근 스낵이었다. 저 커다란 호랑이가 그 조그마한 당근을 사왔다는 것이 웃겼다. 이 호랑이 제법 웃기고 스윗하네? 혁재가 당근을 건네받으며 입을 열었다. 통통한 윗입술에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저 당근은 별론데. 샤인머스켓 맛은 없었어요?”

“짜증난다.”

순간 둘이 서로의 얼굴을 보고 푸하하 소리가 날 만큼 크게 웃었다. 짜증난다는 문장이 이렇게까지 웃긴 문장인지는 몰랐는데 말이야. 직접적인 감정을 표현한 동해도 처음이었고, 그 상황 자체가 너무 어색해서 웃겼다. 우리 둘이 지금 뭐하냐 싶은 반응이었다.

 

한참을 웃고 나서야 동해가 진지한 목소리로 갑자기 혁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두 귀는 보이지 않았지만 넓은 등 뒤로 길고 탐스러운 꼬리가 보였다.

“저기… 조금 늦은 것 같지만, 닉네임 말고 이름은 뭐예요?”

“네?”

“전 이동해. 제리씨는?”

혁재는 처음으로 듣는 동해의 이름이었다. 그동안은 닉네임으로 부르거나 저기요 정도의 호칭을 쓸 수밖에 없었다. 본인에게는 정식으로 소개해준 적이 없으니까.

“저는 이혁재입니다.”

혁재는 기쁘게 대답했다. 정식으로 본인의 이름을 소개했다. 누가 음악을 튼 것도 아닌데 귓가에 경쾌한 엔딩곡이 들렸다.

 

 

닉네임이 아닌 서로의 이름을 알아간다는 것. 이곳 행토피아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걸 아시나요.

‘당신의 종족, 그 어느 것이라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오늘도 편견과 외로움이 없는 이곳. 행토피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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