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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보고싶어

천월애

- 1504번째 기회

 

또 시작이다. 이동해는 꼭 한 번씩 이랬다. 가끔은 의젓하게 굴다가도, 이럴 때는 정말 어린 아이처럼 막무가내였다.

 

"내 생일인데 왜 같이 안 가냐고."

"너 왜 내가 스케쥴 있는 날 생일이니."

"야, 스케쥴 안 하고 같이 가야지."

 

반복되는 대화에 열이 치받았다. 아쉬운 건 혁재도 매한가지였다. 간만의 해외공연. 무대에서 팬들의 함성소리를 듣는 건 혁재가 아이돌로서 가장 큰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동해의 생일 당일날이 공연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을 함께 보내며 누구보다 가까이서 챙겨주고 싶은 마음은 당연했다. 그렇지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나 지금 안 가면 늦는다고."

 

버럭 화를 내보아도 이동해는 묵묵부답이었다. 혁재의 눈이 휴대폰의 시계로 향했다. 이젠 정말 못 참겠다. 시간이 없다. 메인 MC로 들어간 예능 프로그램, 이제 막 반응이 오기 시작한 참이었다. 어쩌면 커리어에 중요한 한 획이 될 수도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렇게 '납치-1시간 전 이동해의 표현을 그대로 빌렸다-' 당해서 스케쥴을 펑크 내는 건 이혁재의 책임감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본인의 생일을 핑계로 스케쥴 시간 전까지만 놀아달라던 이동해는 갑자기 말을 바꿔 무조건 자신과 함께 출국해야 한다며 차를 공항으로 돌렸다. 이러려고 매니저도 마다하고 혼자 차를 몰고 온 것인지 그 치밀함에 소름이 돋았다.

 

 

 

혁재는 결단을 내렸다. 매니저를 불렀고, 동해의 눈을 피해 안전벨트를 풀고 문의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3, 2, 1... 타이밍 좋게 뛰쳐나왔다. 조금 위험했지만 몸이 다치지 않았으니 됐다. "야, 이혁재. 너 미쳤어!?" 횡단보도 부근에 차를 세워뒀던 매니저가 놀라서 달려온다. 아니, 미친 건 내가 아니라 이동해야. 창문 너머로 뭐라 뭐라 소리를 지르는 이동해가 점차 멀어져 갔다. 신호도 이미 바뀌었으니 이곳으로 돌아오려면 아마 금방은 안 될 것이다. 혁재는 얼른 매니저의 차에 몸을 실었다.

 

"빨리 가자. 나 늦으면 안 돼."

 

뭐라 잔소리를 더 늘어놓으려던 매니저는 아무 말도 않겠다는 듯 꾹 감은 혁재의 눈을 보고 포기한 듯 고개를 돌렸다. 시동이 걸리고 차가 출발한다. 심하게 막히지만 않는다면 늦지 않을 수 있다. 혁재는 그제야 안도했다.

 

 

 

동해의 생일 당일에 있는 해외 공연 무대에 초청 당한 D&E,

그러나 국내 예능 스케쥴로 인해 한국에 머물러야 하는 혁재,

결국 홀로 출국을 하게 된 동해.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동해가 안쓰러운 건 맞았고 그 때문에 미안함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무작정 납치를 해버리는 건 정말 이동해가 잘못한 게 맞다. 쉴 새 없이 울리는 휴대폰의 진동이 거슬렸다. 부재중 통화 5통 이동해. 화면이 깜빡이기 무섭게 여섯 번째 전화가 울렸다. 한숨을 푹 내쉰 혁재가 휴대폰 전원을 종료했다. 눈에 아른거리는 이동해의 슬픈 눈동자를 애써 모른척하며 차에서 내렸다.

 

 

 

 

 

 

 

결국 예정대로 스케쥴을 진행하게 되었지만, 혁재라고 마냥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뒤늦은 조바심이 올라와 이동해에 대한 분노와 저울질을 했다. 이동해가 종종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기는 했어도 오늘처럼 실행에 옮겨 혁재를 난처하게 만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정말 오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이동해가 갑자기 왜 그랬는지. 시작할 때만 해도 무거운 분노가 거의 바닥과 맞닿아 있던 저울의 중심은 촬영의 끝날 때쯤 조바심의 쪽으로 잔뜩 기울어져 있었다.

 

 

 

"동해는? 비행기 잘 탔대?"

 

PD의 촬영 끝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출연진들과 인사를 나눌 정신도 없이 매니저에게 달려가 물었다. 어쩐지 매니저는 불안한 것처럼 보였다.

 

"그게..."

 

어물쩡 대답을 흐리던 매니저의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병원에 있대요."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반복되는 여자의 목소리가 야속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냥 비행기 타서 폰을 꺼둔 것뿐이잖아.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이동해가 갑자기 왜. 아침에만 해도 밝았던 동해가 왜. 지금쯤 한참 비행 중이어야 하는 이동해가 왜 아직도 한국에 남아 있는 건데. 그것부터 말이 안 되잖아. 동해와 공항까지 함께 해줬으면 동해는 괜찮았을까. 오늘 스케쥴을 어떻게든 조정했더라면, 그러면 동해는 다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니야,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잖아. 미련한 이동해가 그렇게까지 무리해서 따라오려고 할 줄은 몰랐으니까. 의미 없는 후회와 자책, 그리고 자기방어가 마음 안에서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도 혁재의 눈에선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동해야, 보고 싶어. 보고 싶다고..... 유난히 길었던 하루에 현기증이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 때쯤, 혁재는 까무러치듯 정신을 놓았다.

 

 

 

 

 

*****

 

 

 

 

 

이혁재... 이혁재.. 이혁재... !!

 

아득한 곳에서부터 희미한 소음이 들려왔다. 알아들을 수 없던 웅성거림이 점차 구체적인 말소리가 되었고, 그게 적어도 수 명이 부르는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나서야 혁재는 눈을 떴다.

 

강렬한 햇빛에 적응하지 못해 눈을 두어 번 껌뻑이다가 찬찬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에 보이는 건 햇볕 주위로 몰려든 동그란 얼굴들, 수많은 눈동자, 그리고......

 

"혁재야, 괜찮아?"

 

익숙한 목소리에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야, 이동핵! 너 괜찮아?!?!?!"

 

감정을 담아 빽 내지른 소리에 동해의 낯에는 당황한 기색이 서렸다. 본능적인 불길함이 온몸을 스쳤다. 혁재가 아는 이동해는 이런 표정을 짓는 법이 없었다. 아마 '우리 혁이, 나 걱정했구나?'같은 느끼한 멘트나 내뱉었겠지. 그러고 보니 동해의 얼굴이 너무 앳됐다. 혁재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인파들도 마찬가지였다. 돌연 기억의 파도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에 못 이겨, 푸르른 잔디밭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채로 관자놀이에 손을 얹어 꾹 꾹 눌렀다. 누가 봐도 중학교 체육복이다 싶은 옷을 입고 있는 이동해는 그런 혁재가 걱정된다는 듯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 잠깐만, 너 동해 맞아? 여기 어디야?"

"응, 나 동해야. 괜찮은 거야? 우리 축구 하고 있었잖아."

 

다정하게 대답하는 목소리는 분명 이동해가 맞았다. 아니, 분명 이동해가 아니었다. 이동해는 직장 동료이자 애인인데, 아니 이동해는 우리 반 반장이고 오늘 처음 말을 섞은 사이인데. 혼재된 기억이 머릿속을 괴롭혀 도저히 정리되지 않았다. 혁재와 동해를 둘러싼 말소리가 점차 커졌다. 웅성웅성. 수군수군.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부유물은 혁재에게 호의적인 내용은 확실히 아니었다. 소란 속에 동해가 손을 건넸고, 혁재는 동해의 손을 잡고 마침내 발로 땅을 내디뎠다.

 

"미안, 괜히 너한테 무리한 부탁을 해서. 들어가서 쉬고 있어."

 

동해의 말에 거리낌없는 탄식이 쏟아졌다. 야 이동해 미쳤냐, 무조건 1등이라며. 인원 빠지면 어떻게 이기냐고. 그렇지만 어쩔 수 없잖아. '우리 반' 친구들 사이에서 몇 번의 언쟁이 오갔다. 맞다, 반 대항 축구대회를 하고 있었지. 원체 학급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혁재지만, 이번에는 동해의 부탁을 받아 선수로 뛰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부상을 당해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동해는 혁재에게 무리하지 않아도 되니 출전 인원으로 이름만 올려주기를 부탁했고, 마음이 약해진 혁재는 머릿수만 맞춰주는 조건으로 잔디밭에 불려 왔다. 그러다 예상치 못하게 강하게 날아온 축구공에 뒤통수를 맞고 잠시 기절했던 모양이다.

 

"아냐, 나 괜찮아 뛸 수 있어."

 

머리를 좌우로 털고 당장에라도 달려나갈 듯한 자세를 취했다. 머리가 여전히 지끈거렸지만 축구라면 자신 있었다. 그냥 축구 경기를 뛰고 싶었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만, 아무튼 혁재는 조금 신이 난 상태였다. 간만의 축구라니 어디 몸 좀 풀어볼까. 축구를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지금까지 반 대항 축구대회를 나 빼고 진행할 생각을 했다니 뒤늦게 서운함이 밀려올 지경이었다. 동해가 말리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지만 반드시 이겨야 한다며 이를 가는 반 친구들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다시 경기가 진행됐다.

 

 

 

 

 

 

 

교실이 온통 들썩였다. 중학교 1학년의 남자애들은 반 대항 축구대회 1등이라는 작은 일로도 인생의 기쁨을 전부 맛본 듯이 신나 있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의 중심은 혁재였다.

 

"야, 이혁재 너 축구 잘하는 거 왜 숨기고 다녔냐!"

"그러니까. 이번에 안 뛰었으면 절대 모를 뻔했잖아."

 

1:0으로 마친 경기. 유일한 골을 넣은 건 혁재였다. (근처에 있던 동해가 결정적인 어시스트를 해준 탓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축구부 주장인 이동해가 축구를 잘하는 건 당연했으므로 그다지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매일을 반에서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다니는 혁재가 알고 보니 운동을 꽤 잘한다는 사실은 반 아이들에게 굉장한 놀라움으로 다가왔고, 혁재는 그 칭찬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알았다.

 

"아, 그럼~ 내가 또 능곡초 축구부 출신이잖아! 공 좀 차지~"

 

능곡초. 분명 익숙한 모교의 이름인데 막상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무언가 까끌거리는 듯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능곡초? 거기가 어디야?"

"엥 너 연동초 출신 아니었어?"

 

중얼거리듯 곱씹는 친구들의 말에 머리가 지끈거릴 때쯤, 구세주처럼 나타난 이동해가 내 팔을 이끌었다.

 

"혁재야, 나랑 매점 가자. 할 얘기가 있어."

 

 

 

 

 

 

 

"애들이랑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별 얘기 아냐, 그냥..."

 

출신 초등학교를 헷갈렸다는 말이 무의식중에 입안에 차올랐다. 그러나 이내 그게 얼마나 의미 없는 생각인지 깨달았다. 이동해, 연동초 전교회장. 처음에 중학교에 들어와 동해랑 같은 반이 됐을 때부터 혁재가 동해를 알고 있던 이유는 동해와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이었다. 뜬금없이 다른 초등학교 이름을 얘기한 본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꿈을 꾼 것 마냥...

 

"그냥?"

 

길어지는 공백에 동해가 고개를 까딱였다. 혁재는 동해가 사준 딸기우유의 빨대 끝을 괜히 쪽 한 번 더 빨았다.

 

"그냥 나 축구 잘한다고, 애들이..."

"그래? 그 정도는 아니던데?"

 

어렵사리 얼버무렸으나 즉각적으로 받아치는 동해의 말에 열이 올랐다. 야, 이동해!! 어느새 올라간 동해의 입꼬리에는 장난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낯설지만 익숙한 기분. 어쩐지 동해와 앞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그렇게 평범한 매일이 지나갔다. 무난하다면 무난했고, 행복하다면 행복한 하루하루. 축구부의 부원이 되어 좋아하는 운동도 원 없이 할 수 있었고, 수련회 장기자랑에서는 반 대표로 무대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혁재의 곁에는 늘 친구가 잔뜩이었다. '친해지기 전에는 너무 조용해서 다가가기 어려워 보였으나, 막상 친해지고 나니 너무 재미있는 친구'라는 말은 정말 귀에 딱지가 박히도록 들은 말이었다. 혁재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이전에는 왜 친구들과 어울릴 생각을 하지 못했나 싶지만, 어찌 됐든 지금은 모두 친한 친구들이니 다행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친한 친구를 꼽자면 당연 동해였다. 홀로 다니는 것에 익숙하던 혁재로서는 이렇게나 가까운 존재가 생겼다는 사실이 유난스러웠다. 중학교 2학년이 되고도 같은 반이 된 동해는 지겹게도 혁재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었지만, 그만큼 혁재에게 안정을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다만,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도중에도 문득 무언가를 잊은 것 같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듯한 생소한 느낌. 꼭 인생의 다른 루트를 이미 경험하고 온 것 같은 이질감이었다. 기억인지 상상인지 모를 무언가는 생각이 많아질 때마다 그 틈새를 노리지 않고 파고들었다. 처음에는 일상생활에서도 혼란을 겪을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차 옅어져 이제는 떠올리려고 애써야 잠시 생각나는 정도가 되었다. 혁재는 그 무언가를 길고 긴 꿈으로 정의하기로 했다.

 

 

 

 

 

***

 

 

 

 

 

정말 이혁재답다. 급한 일이라며 밤 10시에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더니 동해의 손을 이끌고 아무도 없는 놀이터로 내달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야기를 듣자하니 혁재가 아끼던 초코빵을 혁재의 누나가 홀랑 다 먹었다는 소리다. 혁재가 똑같은 것으로 내놓으라고 따지자 먼저 먹은 사람이 임자라며 거부했다고. 엄마한테 이른다고 해도 먹히지 않자 반항의 의미로 집을 나온 거라고 했다. 큰일도 아닌 걸로 놀라게 한 것에 혼쭐을 내주려다가 뚱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이던 혁재가 귀여워 참았다. 한참을 어르고 달래며 집에 들어가는 것이 낫지 않겠냐 권했지만 그건 죽어도 싫단다.

 

"나는 졸려서 집에 가고 싶은데?"

 

진심 반 장난 반으로 답하니 축 처진 표정이 혁재의 심정을 대변한다. 아, 이혁재 진짜 귀여워. 웃음이 터졌다. 깔깔거리며 웃고 있자니 이혁재가 짜증 섞인 말투로 투정을 부렸다.

 

"야, 뭘 웃냐고 이 멍충아아."

 

하나도 아프지 않은 혁재의 주먹을 맞아주다가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조금 더 놀아줄게. 그런데 조건이 있어."

"뭔데?"

"아무도 모르는 너의 비밀 한 가지를 얘기해줘."

"말 안 하는 게 비밀이지 말을 왜 하냐?"

"그럼 나 간다?"

"아, 잠만 잠만 기다려봐."

 

속마음을 자주 털어놓는 동해와 달리 혁재는 본인의 얘기를 잘 하지 않았다. 수련회 진실게임처럼 다 같이 있을 때은 물론이고 단둘이 있을 때도 말이다. 성격의 차이임을 알지만 때로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동해였기에 한 번쯤은 이런 부탁을 하고 싶었었다. 그래야 온전히 혁재와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조금은 치기 어린 마음이었다. 진지하게 말을 고르던 혁재가 마침내 입을 뗐다.

 

"나 사실 긴 꿈을 꿨었어. 너와 내가 함께 나오는 꿈."

 

혁재의 말을 요약하자면, 혁재는 꿈 속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이돌이었고 동해 역시 같은 그룹의 멤버였다고 한다. 슈퍼주니어. 데뷔는 2005년 11월 6일. 혁재와 동해는 20살의 나이로 다인원 그룹의 구성원이 되었다고 했다.

 

"정말? TV도 나왔어? 우리 둘 다?"

"응. 콘서트도 여러 번 했고."

"키야, 꽤 멋진데. 그런데 그룹 인원이 그렇게 많았으면... 정작 우리 팬은 별로 없던 거 아냐?"

"야, 아니거든? 내 찐덕후들도 얼마나 많았는데!!"

 

동해의 장난에 혁재가 목소리를 높였다. 동해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텅 빈 놀이터에 울려 퍼졌다. 혁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동해와 혁재는 팀 내 동갑내기 친구로 어렸을 때부터 환상의 케미를 자랑했고, 데뷔 연차가 쌓였을 때는 단둘이 유닛활동을 하기도 했단다. 작사 작곡은 물론이고 활동 컨셉과 콘서트 디렉팅까지. 활동 전반적으로 참여도가 높았던 탓에 유닛에 대한 애정도 유난히 깊었다고 했다. 녹음, 안무 연습, 화보 및 광고 촬영, 무대와 예능 스케쥴, 콘서트 투어. 아무리 빡빡한 일정도 함께라면 지치지 않았단다. 그 말을 하는 혁재는 너무나도 행복해 보여서, 가만히 듣고 있던 동해가 꿈 속 '동해와 혁재'의 사이를 의심할 정도였다. 가늘게 뜬 동해의 눈초리를 의식한 혁재가 당황하여 고개를 돌렸다.

 

"....어어. 너랑 나랑 애인 사이였거든. 내... 꿈에서....."

 

집요한 동해의 시선에 혁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동해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오~ 이혁재 나 좋아하나 봐? 나랑 사귀는 꿈도 다 꾸고?"

 

동해의 입꼬리가 정도를 모르고 씰룩였다. 야, 그런 거 진짜 아니거든!!!!!! 역정을 내는 혁재에게 정말 장난이었다고 한참을 사과한 후에야 이야기를 계속 이어 들을 수 있었다. 둘은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되었는지. 언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는지. 어떤 시간들을 함께했는지. 동해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전부 궁금해했고, 혁재는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많은 내용을 털어놓았다. 둘이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당사자인 동해 앞이라는 사실이 낯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동해가 워낙 진지하게 듣고 있는지라 중간에 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와 함께이던 순간들은 모두 행복했어?"

"응. 가끔은 의견이 안 맞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지만 그래도 늘 행복했어."

 

거기까지 대답한 혁재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혁재의 기나긴 꿈의 마지막 이야기. 여전히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동해의 눈빛에 못 이겨, 혁재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의 생일 날 사고가 났어. 그날 따라 동해가 이상하게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거든. 그래서 화를 내고 억지로 도망갔는데, 날 따라오려다가 사고가 난 거야. 꼭 사고 날 걸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너는 왜 내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을까."

 

동해가 손을 뻗어 혁재의 뺨을 어루만졌다. 언젠가부터 흐르고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동해의 엄지손가락에 막혀 자취를 감췄다. 혁재는 고작 꿈 얘기에 이렇게까지 감정이 휘몰아치는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도중에 그만두면 안 될 것만 같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너의..., 아니 꿈 속 동해에게 사죄하며 펑펑 울었어. 내가 스케쥴이 없었으면, 내가 동해를 따라갔으면, 아니 내가 스케쥴을 조금만 미뤘어도 무언가 달라졌을까 싶어서....."

 

동해는 혁재를 꼭 안았다. 아무래도 혁재는 여전히 꿈속의 동해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단지 꿈일 뿐이지만 혁재가 누군가를 열렬히 그리워한다는 것에 질투도 나고, 혁재가 본인을 상대로 길고 생생한 꿈을 꾸었다는 것에 벅차오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품에서 몸을 떨며 진심으로 서러워하는 혁재의 모습을 보니 동해의 마음마저 저릿했다.

 

"나 여기 있잖아.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동해는 그렇게 다짐하며 혁재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심장 소리가 고요한 밤 놀이터에 울려 퍼졌다.

 

 

 

 

 

 

 

나른한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좋았다. 어젯밤 끌어안았던 혁재의 온기가 품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제 밤 혁재의 꿈 이야기를 듣고 나서 혁재를 안고 있다가, 눈물에 폭 젖은 혁재가 지나치게 예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꽤 오랜 기간 꿈꿔왔으나 실행에 옮길 생각은 못하던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잠시 멈칫했던 혁재가 부드러운 입술을 달싹였다. 둘은 입술을 가만히 붙인 채로 한참을 있었다.

 

태어난지 14년 만에 첫 키스-뽀뽀-였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집에 왔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혁재의 집 앞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다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다시 집에 데려다 달라고 졸랐고, 그렇게 짧은 거리를 몇 번 왕복하는 사이 어느새 손을 잡고 있었다. 결국 혁재를 찾으러 나온 누나와 마주쳐 혁재를 집에 보내면서도 마냥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동해는 답지 않게 이불을 팡팡 찼다. 오늘 학교에 가면 혁재를 뭐라고 부를지 애칭을 오만 가지 생각하면서.

 

 

 

 

 

 

 

동해는 가만히 누워 오늘 하루 있던 일을 회상했다. 사라졌다. 소멸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 16번이 학기 시작 직전 전학생으로 인한 결번이라고 했다. 연동초 졸업앨범을 아무리 수백 번 수만 번 뒤져도 이혁재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수첩에 적힌 집 전화번호와 주소도, 곱게 인화하여 책상 유리 아래 끼워뒀던 사진들도 모두 흔적조차 없었다. 엄마는 동해가 어젯밤에 외출한 적이 없다고 했다. 벚꽃잎이 곱게 날리던 4월 4일, 이혁재는 그렇게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 그러나 입술에 남은 감촉만은 아직 생생했다. 동해는 이 모든 것이 꿈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혁재야, 보고 싶어. 공교롭게도 바로 어제 이혁재가 내뱉은 말들을 기억했다. 해야 할 것은 명확했다.

 

서울에 가야겠다.

 

그곳에 가면 혁재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핑계 삼아 홀로 상경했다. 다행히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다. 혁재가 언급했던 회사에 오디션을 보고 합격했다. 정식 연습생이 되자 회사 누나가 동갑인 친구를 소개해주겠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혁재에게 이야기 들었던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누나에게 들려 오해를 살까 가슴을 손으로 꽉 쥐고,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어 땅만 보고 걸었다. 누나의 걸음이 멈춰 서고 앞에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그리던 얼굴이었다.

 

"안녕, 나는 동해야."

 

떨리는 손을 내밀며 내뱉었다. 상대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안녕, 나는 혁재야."

 

아무 것도 모르는 혁재의 손을 꼭 움켜쥐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감격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혹시나 잊어버릴까 들었던 내용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반복적으로 외워왔던 동해와 혁재의 역사를 직접 재현할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목포에 잠시 머물렀던 '미래의 이혁재'가 해준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동해와 혁재는 금세 가까워졌으며 슈퍼주니어라는 동일한 그룹의 멤버로 데뷔를 했다. 연차가 차고 나서는 프로젝트 성 듀엣 그룹을 결성했고, 의외로 반응이 좋아 지속적으로 앨범을 내고 투어를 돌 수 있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서는 마침내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 혁재가 동해에게만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미래의 혁재가 사소한 혁재의 기호까지 하나하나 미리 귀띔해준 덕분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2026년이 되었고, 동해는 자신의 행복이 끝을 보인다는 걸 직감했다.

 

동해의 생일 당일에 있는 해외 공연 무대에 초청 당한 D&E,

그러나 국내 예능 스케쥴로 인해 한국에 머물러야 하는 혁재,

결국 홀로 출국을 하게 된 동해.

 

들었던 '그 날'의 상황 그대로였다. 지금까지는 미래의 혁재가 알려준 것이 곧 정답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동해가 출국을 하지 않는 것, 혁재를 스케쥴에 보내지 않는 것, 혹은 각자의 일을 하는 것. 어떤 것이 정답일지는 알 수 없었다. 무작정 혁재에게 전화를 걸어 나오라 채근하면서도 마음 한쪽이 무겁기만 했다. 생일이니 놀아달라 보채느라 두 시간, 혁재에게 스케쥴 장소에 직접 데려다 주겠다며 또 한 시간을 끌었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졌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무엇이 되었든 혁재를 위험하지 않게, 슬프지 않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했다. 혁재를 태우고 공항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동해의 생일이랍시고 평소보다 더 순둥하게 굴던 혁재는 스케쥴 시간이 다가오자 예민해졌다. 매니저와 연락을 주고받고 차에서 함부로 내릴 생각을 하는 혁재를 위해 동해가 할 수 있는 건, 신호가 바뀌기 전부터 속도를 서서히 줄이고 차를 최대한 인도 쪽으로 붙여서 혁재가 다치지 않고 내릴 수 있는 타이밍을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

 

자동차용 신호등에 빨간 등이 켜졌고, 횡단보도에는 사람이 지나다니기 시작했다. 전방에 매니저의 차가 정차된 것도 확인했다. 달칵- 혁재가 안전벨트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괜시레 긴장되어 침을 삼켰다. 횡단보도의 불빛이 깜빡였다. 시간이 얼마 없다. 동해는 시선을 일부러 반대편으로 돌렸다.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혁재가 차에서 내렸다.

 

혁재가 무사히 매니저의 차에 올라타는 것을 확인한 동해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매니저의 차는 방송국으로 향하기 위해 그다음에 있는 신호에서 유턴했다. 이제 마지막 선택지였다. 차를 돌려 혁재를 따라갈 것이냐, 이대로 계속 공항으로 향할 것이냐. 미래의 혁재도 알려줄 수 없던 부분이었다. 마침내 굳은 결심을 한 동해가 핸들을 움켜잡았다.

 

 

 

 

 

 

 

아슬아슬하게 공항에 도착했다. 애초에 혁재와 함께 있으며 시간을 끌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는 만나자마자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나마 비행기가 연착되어서 다행이지 늦으면 어떡할 뻔했어요? 그러게 데리러 간다니까 왜 직접 운전을 한다고 해서..."

 

점점 길어지는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그걸 본 매니저는 포기한 듯 고개를 젓는다.

 

"아무튼, 꽤 상황이 심각한가 봐요. 여기도 거기도 안개가 자욱해서. 심하면 오늘 비행기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대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두 손을 꼭 모으고 기도했다. 비행기가 취소되게 해주세요. 공연도 캔슬할 수 있으면 더 좋아요. 당장의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럴수록 혁재가 더 보고 싶었다. 오늘 같은 불길한 날에 다른 나라로 떨어지면 정말 영영 혁재를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아 동해는 빌고 또 빌었다. 혁재와 평생을 떨어지지 않을 수 있게 해달라고.

 

 

 

 

 

*****

 

 

 

 

 

이혁재... 이혁재.. 이혁재... !!

 

아득한 곳에서부터 희미한 소음이 들려왔다. 알아들을 수 없던 웅성거림이 점차 구체적인 말소리가 되었고, 그게 소중한 사람이 부르는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나서야 혁재는 눈을 떴다.

 

강렬한 불빛에 적응하지 못해 눈을 두어 번 껌뻑이다가 찬찬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에 보이는 건 말간 형광등 위로 몰려든 동그란 얼굴들, 수많은 눈동자, 그리고......

 

"혁재야, 괜찮아?"

 

익숙한 목소리에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야, 이동핵! 너 괜찮아?!?!?!"

"우리 혁이, 나 걱정했구나?"

 

두 팔 벌려 안아오는 품은 분명 이동해가 맞았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엉엉 울며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혁재를 도닥이며 동해가 말했다. 너를 걱정시켜 미안하다고, 그래도 틀리지 않은 선택을 해서 다행이라고.

 

 

 

*

 

 

 

모든 일이 평화로웠다. 한국 측 기상 문제로 당일 항공편이 완전히 취소됨에 따라 동해가 참석해야 하던 공연에도 문제가 생겼다. 해당 공연은 원래 양일간 진행될 예정이었기에 현지 공연사는 공연 순서를 급히 조정하여 D&E를 다음날 초청하기로 결정했다. 혁재도 함께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 공연사 측에서도 손해만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동해의 상처도 그리 크지 않았다. 혁재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기쁨에 혁재의 퇴근길에 데리러 가던 동해가 매니저를 보채며 속도를 높여 벌어진 사고였으나, 가벼운 타박상이 전부였다. 혁재는 미련하다며 동해의 가슴팍을 콩 쥐어박았고 동해는 상처보다 혁재에게 -솜방망이로- 맞은 가슴이 더 아프다며 앓는 시늉을 하다가 한 대를 더 맞았다.

 

 

 

다음 날 오전으로 비행기 시간이 미뤄지며 동해와 혁재에게는 애매한 반나절의 시간이 생겼다. 회사 측에서는 '어차피 몇 시간 뒤에 다시 공항으로 와야 할 바엔 그냥 이 근처 호텔에서 둘이 숙박하도록 하겠다'는 동해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생일 날 밤을 혁재와 함께할 수 있게 된 동해는 너무 신나 입꼬리가 귀에 걸릴 정도였다. 혁재도 내심 기뻐하며 준비했던 선물을 꺼냈다. 몇 년을 걱정하던 동해의 '그 날'은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이, 아니 그저 행복한 날로 기억에 남았다. 앞으로도 몇십 년은 지속될 둘만의 이야기의 평범한 한 페이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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