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는 내 운명
파인
너는 내 운명
영화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 기반
수많은 기자와 더 많은 카메라와 쉴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를 보면서도, 이것이 현실임을 믿을 수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럴 수밖에. 어제의 취준생이자 서*웨이 아르바이트생이, 오늘은 당장 전 국민의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남은 평생 이보다 많은 사진을 찍힐 날이 있긴 할까. 혁재는 현실감 없는 기분으로 저를 찍어대는 카메라들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시다 못해 아프다. 연예인들은 어떻게 눈도 깜빡하지 않고 카메라를 쳐다보는 거지?
몰려든 기자들은 조금의 감상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혁재 씨! 맞죠? 이혁재 씨! 스캔들이 사실입니까? 이혁재 씨! 왕세자와 만난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이혁재 씨, 이혁재 씨…! 그놈의 ‘이혁재 씨’ 어찌나 불러대는지, 늘 듣던 제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 잠시만요! 밀지 마세요. 저는….”
저는…. 저는….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해? 오래된 주택의 대문에서부터 작달막한 제 안식처의 입구까지, 기자들은 삽시간에 몰려들었다. 달갑지 않은 손님들에게 제 공간이 침범당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혁재는 일단 그 무도한 파도를 막아보려 노력했다. 들어오지 마세요. 제집도 아니라구요! 다만 혁재의 뇌는 지금 생각하기를 멈춘 상태였다.
당연했다. 얼굴도, 몸도, 하다못해 거기도 잘난, 제 남친이 이 나라의 왕세자라는 걸, 무려 한 시간 전에 알았기 때문이다. 왕세자. 세자 전하. 즉, 다음 임금님이 되는 자리. 그러니까, 평범하디 평범한 이혁재와 물고 빨고 할 것 다 한, 그 남자가, 이 나라의 하나뿐인 왕자님이란 것이다.
한 시간은 참 짧았다. 수년간 저를 속인 그에게 배신감조차 느낄 틈이 없을 만큼. 평범 그 자체로 살아오던 이혁재의 이름이 온 포탈, 커뮤니티, 유튜브에 오르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황당무계한 속보에, 친구들이 혹 저를 놀리려 만든 가짜 기사가 아닌가 했다. 하필 4월 1일이었다. 설마 만우절 장난 따위가 이렇게까지 현실감 있을 수 있나. 하긴 이 상황이 진짜 사실이기보단 IT 업계로 진출한 친구들이 만든 가상현실 어쩌고일 가능성이 더 큰 게 아닌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진짜 이게 말이 돼? 혁재는 머리카락을 다 쥐어뜯고 싶은 심정으로 자신에게 다시 한번 반문했다. 영화야? 드라마야? 요샌 드라마도 이렇겐 만들면 욕을 먹는다. 가업을 물려받는다기에, 그냥 그런 부잣집 도련님인 줄만 알았지. 아르바이트 따윈 모르는 그 인생이 조금 부러울 뿐이었지. 왕자라니, 세자라니. 그리고 제가 이 나라의 후계자와 사귀는 사이라니! 차라리 꿈이 낫겠다. 누가 좀 깨워주면 소원이 없겠다.
“일설로는 이동해 왕세자가 보위에 오르는 조건으로 이혁재 씨와의 결혼을 걸었다는데, 사실인가요?”
“동성혼이 합법으로 인정된 지 아직 2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국민 정서에 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으십니까?”
결혼? 무슨…. 누구 마음대로? 뭐? 황당함은 점점 극에 다다랐다. 이대로 기절해버리고 싶은 날이 아닐 수 없었다.
*
전 세계가 K-문화에 열광하는 지금, 딱히 K-문화 사업 증진에 공을 세우진 않고도 그 콩고물을 주워 먹는 중인 코리아의 왕실엔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왕자가 있다는 것을 국민 대부분은 알고 있었다. 본래 현대의 왕실은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 시켜주는 국민에게 삶의 모든 걸 전시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나, 왕실의 과보호엔 너무나 합당한 이유가 있었으니, 왕세자의 신상이 극비로 유지되는 것은 국가적으로 암묵적인 동의를 이뤘다. 2대의 걸쳐 일어난 비극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첫 비극은 40년 전, 현 국왕의 하나뿐인 동생이 납치 및 행방불명 된 사건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은 당시 왕세자였던 국왕과 그의 동생을 착각했고, 한 나라의 둘째 왕자는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췄다. 온 나라가 나서 실종된 왕자를 찾았지만, 일곱 살이던 아이는 형이 왕위에 오르고 자식을 낳을 때까지 목격담 하나 없는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그렇게 동생을 가슴에 묻었던 형은 수십 년 후 제 자식마저 잃어야 했다. 일곱 살 난 왕세자의 음식에 독이 들어간 까닭이다. 동생과 자식을 같은 나이에 잃은 왕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금슬이 퍽 좋았던 국왕 부부가 십 년 가까이 둘째를 가지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모든 국민이 그 마음을 이해했다.
그러니, 십 년 만에 태어난 둘째 왕자를 꼭꼭 숨기는 수밖에.
어린 시절에 외국으로 나갔다고 했던가. 평소엔 제가 입헌군주제 국가의 국민이란 사실을 잊고 사는 혁재 역시 저와 동갑이라던 둘째 왕자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정말 머리털 하나 공개되지 않았으니, 혹자는 왕자의 얼굴이 답도 없는 추남이라고 했고, 어떤 이는 왕자의 성품이 개차반이라고도 했으며, 또 다른 이는 심지어 왕자가 사실 여자라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까지 했다. 숨겨진 왕자에 대한 소문은 언제나 이 나라 최고의 가십거리였으나, 유독 근래에 낭설이 심해진 까닭은, 그 비밀의 왕자가 올해로 성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왕자에 대해 국민이 아는 건 나이 하나뿐이었으니까.
“왕자님 인생도 쉽진 않네. 불쌍하다.”
혁재가 선택한 선택 교양은 개항 후 근현대사. 중간고사를 레포트로 대체 하는 과목이기에 가장 먼저 신청한 과목이다. 그 대체 레포트의 주제가 1900년대 이후 왕실의 주요 사건이었고, 혁재는 사람이 없는 야간 시간을 노려 열심히 과제를 휘갈기는 중이었다.
어릴 땐 왕자님이 꽤 부러웠는데. 지금은 목숨을 위협받는 왕자보단 그냥 가난한 대학생이 낫지, 싶다. 으으, 소름 돋는다. 혁재는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 과제에 집중했다. 어떻게 보면 한 가족의 비극이다. 그런 사건이 사람으로서 가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너무나 평범한 이혁재의 인생엔 그런 비극보단 당장 다음 학기의 등록금이 중요했으므로, 야간 편돌이는 왕실의 비극에 과몰입을 멈추고 당면한 과제에 박차를 가했다. 그때였다.
“저기요.”
“네, 손님.”
“아보카도는 없어요?”
“네?”
“말귀 못 알아듣습니까? 아보카도 샐러드 말고, 그냥 아보카도 없냐고요.”
살짝 불손한 남자의 말투가 혁재의 심기를 조금 거슬리게 했지만, 경험상 야간 손님 중 인성에 문제 있는 사람이 한둘은 아니었다. 혁재는 성질을 꾹 누르며, 이를 악물고 친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보카도는 없으세요, 손님. 편의점에서 아보카도를 찾던 남자는 혁재의 대답에 인상을 팍 찡그렸다. 다음 말은 뻔한 것이다. 제대로 찾아본 게 맞냐, 시비겠지. 편의점이 마트라도 되는 양. 모자를 푹 눌러썼지만, 감춰지지 않는 밝은 회색의 머리칼이 유난히 불량스럽게 보였다. 다만 얼굴은 꽤, 잘생겼네. 연예인이야 뭐야.
“분명히 이 지점이 있다고 했는데, 요새 한국 인터넷이 틀리기도 하네요.”
어, 꽤 매너 있네. 당연히 시비조이리라 생각했는데, 불량 머리는 겸연쩍게 웃었다. 죄송해요. 한번 확인해볼게요. 혁재는 예상치 못한 대응에 살짝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편돌이 사전 제 1조 1항, 확인해준다는 말은 절대 금지인데. 그 법을 어긴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감사합니다. 그 남자는 제 대답에 또 웃는다. 정말이지, 참 잘생겼다.
*
사랑 빠지는 것은 한순간이라고 했던가. 수많은 로코 드라마의 묘사는 늘 구태의연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샤랄라, 뾰로롱 하는 연출과 얼빠를 운명이라 개연성. 그래서, 극히 현실적인 이혁재는 늘 그 순간의 묘사를 비웃곤 했더랬다. 운명적인 사랑이 있을 리 없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엇을 믿고 마음을 내준단 말인가. 차라리 저처럼 얼빠가 더 이치에 맞지. 그렇다고 얼굴만 보고 대뜸 연애할 여유도 없었지만.
그랬는데.
그런 제가 그 아보카도 남과 그렇게 눈이 맞을지 누가 알았을까. 그토록 비웃었던 사랑의 운명론이, 그와 저 사이엔 존재라도 하는 듯.
“어?”
“어?”
아보카도 남의 이름은 이동해였다. 학기 중 생뚱맞게 군대로 끌려간 기숙사 메이트의 자리에,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들어온 이가 그였다. 서로 동시에 어? 하고 외친 순간, 갑자기 가슴에 찌릿한 무언가가 지나갔다. 꼭 전기라도 통한 듯한 짧은 통증. 이혁재는 그 감각을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니, 대수롭지 않았다. 신기해서 그런가. 얼굴은 여전히 잘생긴 얼굴이 꽤 반가웠을 뿐. 사실 그는 제 취향의 얼굴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감각의 실체를 아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진짜 신기하다. 운명인가 봐.”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사정상 학기 중 중도 입학하게 되었다는 동해의 시간표는 거의 완벽할 만큼 혁재와 일치했다. 겨우 시간표 따위로 운명을 논하느냐 말하겠지만, 그만큼 혁재의 시간표는 악명이 높았다. 전공 필수를 제외하면 알바에 맞춰 시간표를 짠 통에, 동기 중 누구와도 두 과목 이상 겹치지 못하는 아싸 시간표였기 때문이다. 근로 장학금 받기 위해 점심쯤은 모두 비워두고, 1교시와 오후 수업은 가득한. 그런 저와 점심시간까지 겹치는 시간표라니. 혁재는 그때 처음으로 운명이란 단어를 내뱉었다. 동갑, 동기, 같은 과, 룸메, 시간표까지 같을 수 있나. 이거 정말 운명 아니야?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건들거리던 첫인상과 달리, 동해는 학구파였고, 또한 관대한 룸메이트였다. 늘 알바에 치이는 혁재의 입장에선 필기든 과제든 어떤 조건도 없이 도와주는 동해가 저와 같은 수업을 듣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었다. 게다가 제 집안은 좀 산다며, 기숙사에서 시켜 먹는 배달 음식값을 모두 내는 것이다! 혁재는 생각했다. 혹시 쟤는 천사가 아닐까?
그러던 어느 날, 이동해의 모든 호의가 오로지 저에게만 향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엔…. 인정해야 했다. 실은 그 유치한 드라마, 뻔하기 짝이 없는 영화처럼, 동해에게 첫눈에 반했었다는 것을. 쿨한 척하는 얼빠의 우스운 말로였다.
혁재는 그날부터 동해를 애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남자와 연애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어떤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마치 정해진 일이었다는 듯이, 흔히 말하는 운명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했다.
*
그렇게 시작한 연애는, 어느날은 불처럼 타올랐고, 다른 날은 물처럼 흘러갔다. 살아온 환경이 다른 만큼 마찰은 많았지만, 또 그만큼 이해하며 사랑했다. 캠퍼스 CC로 시작한 가벼운 연애가 무거워지기 시작하자, 혁재는 이 관계가 조금, 아주 조금은 두려워졌으나, 상대가 이동해라면 언제까지나 괜찮을 것 같았다. 동해는 그만큼 사랑을 아끼지 않았으니까. 언제나 저에게 헌신적이었으니까. 그러니, 혁재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꾼 것은 무리한 일도 아니었다.
동해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그렇게 마음먹은 것이 죄라면 죄였다. 그 몇 년의 연애가 이렇게 끝나버릴 줄 알았더라면.
“혁재야.”
“부르지 마.”
“제발 나 좀 봐줘. 얼굴 보고 얘기해야지. 그래야 설명도, 사과도 할 수 있잖아.”
무엇을? 무도한 기자들 사이에 홀로 둔 것을? 어떤 준비도 없이 전 국민에게 아웃팅 당하게 된 것을? 아니면 만나는 내내 저를 기만한 것을? 결국 아주 고상한 목소리의 왕비 마마에게 ‘내 아들 곁에서 떨어져.’라는 말과 다름없는 경고를 듣게 한 것을? 그리하여 이렇게 나를 비참하게 만든 것을?
“헤어져. 더 할 말 없어 난.”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
“너는 나를 몇 년이나 속였어. 국가 기밀이라서 말 못 했다는 변명은 하지 않길 바라. 그럼 처음부터 이 관계를 시작하지 말았어야지. 결혼? 누가 너랑 결혼한대? 왜 네 마음대로 날 다신 없을 꽃뱀으로 만들어? 왜 네 마음대로 그런 조건을 걸어? 나를 배려했다고? 그게?”
봇물 터지듯 터지기 시작한 원망은 마음과 다르게 쉬이 끝나지 않았다. 울고불고, 소리치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배신감을 떠나, 그것은 평민에게도 있는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추하지 않은 이별은 없었다. 혁재는 그렇게 제 운명을 떠나보냈다.
*
“그래. 맞아. 나 아직 너 좋아해.”
벌써 몇 년이나 저를 찾아와 빌던 이 나라의 치기 지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이 대답만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오랜만에 마주하는 웃는 얼굴이다. 여전히 제 인생에서 가장 설레었고, 그래서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다.
그러나 이제 왕자님도 알아야 한다. 세상엔, 사랑만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것들이 퍽 많다는 것을. 평생 귀하게 살아온 그에겐 잔인한 현실이겠지만. 혁재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마음을 굳게 다졌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받아주고 싶을 테니까. 모진 말은 언제나 자신의 몫이었다. 아직 왕자인 이동해의 세상은 동화였고, 언제나 평범한 이혁재의 세상은 현실이었기에.
“하지만 왕자님. 이 나라는 우리의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답니다.”
어찌어찌 어렵게 동성혼이 합법화되었다고는 하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나라의 왕세자가 남자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린 없다. 특히 동성혼의 법제화는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에 나서지 않던 왕세자가 노력한 결과이니 반발은 더욱 심할 것이다. 그것이 누구 때문일진 뻔했으니까.
그저 사랑할 뿐인데,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현실이 서글펐으나, 상대는 차기 국왕이었다. 서로 알지 못했던 길고 긴 세월과 사랑에 빠져 환상적이란 말로도 다 할 수 없는 시간, 저의 사랑이 꿈을 체념시킬 만큼 거대해졌던 순간에도, 이동해는 평생 이 나라를 지켜야 할 의무 위에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종종 쉽게 변했지만, 동해의 책임은 변하지 않았다. 배신감과 원망이 모두 사그라들어 사랑만이 남은 지금이라, 혁재는 더더욱 분명히 현실이 보였다.
“그러니까, 세자 저하도 이제 그만. 나 정말 괜찮으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여전히. 혁재는 입안을 맴도는 말을 꾹 눌러 참았다.
“기다릴게. 네가 나를 다시 받아줄 때까지.”
그래, 쉽게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었지. 혁재는 굳센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연인, 아니 이제 전 연인인, 동해를 바라보며 살풋 웃었다. 저 대책 없을 만큼 거침없는 마음에 속절없이 넘어갔더랬다, 이혁재는. 난생처럼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도 두렵지 않을 만큼 좋아했더랬다, 이동해를.
“이동해.”
“내가 먼저.”
동해는 재빨리 대답을 가로챘다.
“이 나라가 너를, 우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받아들일 수 있게 바꿔볼게.”
꿈같은 이야기를 진심으로 말한다.
“적어도 나는 준비가 끝났어. 모든 것을 감당하고, 너를 지킬 각오가.”
동해는 이야기 끝에 무릎을 꿇었다. 행인들이 동해를 알아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숨이 턱 막힌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왕자는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무수한 눈물과 결심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이토록 잘난 남자가 내미는 손을, 그 마음을, 어떻게 또 외면할 수 있을까.
난 너 없으면 무엇도 아니야. 이 나라의 왕자가 담담히 말했다. 사랑해. 저 사랑으로 가득 찬 얼굴이 또 한 번 무너지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제 이혁재는 처음 만났던 스무 살에도, 감당치 못할 현실에 배신감을 느끼던 스물다섯에도, 결국 그를 완벽히 포기하려 결심한 지금조차. 여전히 이동해를 사랑했으므로. 운명처럼.
혁재는 어린 날 비웃었던 운명론에 항복을 선언하고야 말았다.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이동해가 제 운명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