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또라이와의 k-드라마
20세기 소녀..
K-또라이.
바야흐로 도쿄 야쿠자들 사이에서 동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K-또라이와의 K-드라마
동해는 사실 야쿠자가 어울리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기억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언제나 예쁜 센터, 얼굴마담, 희망의 얼굴 도우쨩. 뭐 그런 것으로 불려왔고, 쓸데없는 힘자랑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싸움 구경은 좋아해도 싸움을 좋아하지는 않았고, 미운 부분 없이 예뻤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으니 소란을 내는 일도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요란할 때는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뿐이었다. 오사카의 빛이 닿지 않는 구석에서 그와 함께 자란 고아원 형제들은 동해를 추억할 때마다 하나같이 그렇게 말했다. 그냥, 예쁘게 생겨서 뭐 나중에 어디 티비에 나올 것 같더라. 열다섯 생일에 갑자기 고아원을 나가서 걱정이었다, 워낙 예쁘고 순해서… 그때 나가서 잘 살았어야 할 텐데…
그렇기에, 현재의 마코토는 혼란스러웠다.
고아원에서 나오고 십 년 가까이 도박에 목숨 걸고 살다가 야쿠자에게 잘못 걸려 시멘트에 묻힘으로 인생 마감하기 5분 전, 눈앞에 나타난 야쿠자 오야붕은.
“어? 맛쨩.”
그들이 열다섯이 되던 해 10월에 고아원에서 사라졌던 희망의 얼굴,
예쁜이 도우쨩, 이었다. 동, 동, 동해. 일본의 이름도 아닌 데다가 어린아이들에겐 생소한 발음이라 대충 뭉뚱그려 도우쨩으로 불려져도 불만 없이 예쁘게 웃어주던 그 애.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그때의 동해는 단순히 일본어가 서툴러서 말이 없을 뿐이었다. 물론 마코토는 그걸 평생 모르겠지만.
온 세상 불만 다 갖고 살던 마코토는 이 순간만큼은 태어나 처음으로 제 출신이 고깝지 않았다. 손수 청테이프를 직직 뜯어주며 맛쨩 너무 반갑다고 예쁘게 웃는 동해에게 무엇이든 갖다 바칠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의 똘마니들은 이 상황이 달갑지 않은 듯 삐딱하게 서 있었으나 토를 달지는 않았다. 마코토는 똘마니들의 눈치를 보느라 어떤 말도 제대로 하진 못했으나 그래도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동해의 손을 잡고 연신 흔들었다. 동해는 예전의 희망 예쁜이 도우쨩 그 모습 그대로 웃음을 터뜨리면서 오랜만에 만난 가족끼리 당연한 건데 뭘 고마워하냐고 했다. 원한다면 제 사업체에서 일하도록 해주겠다고까지 했다. 일본어가 자연스러워진 것을 제외하면 그때의 그 다정한 모습 그대로였다. 마코토는 괜히 눈물이 핑 돌아 한 번 더 제 출신에 감사했다. 맛쨩, 같은 유치한 이름으로 불려도 화가 나지 않았다.
“맛쨩, 그렇게 고마우면 나 부탁 하나 해도 되니?”
“당연하지. 뭔데?”
“내가 당장 내일이라도 결혼을 해야 하거든.”
“어어, 내일?”
“니가 나랑 결혼할래?”
마코토는 순간 혀를 씹었다. 입 안으로 비릿한 맛이 퍼졌다. 동해와 재회한 지 겨우 10분째인데도 너무 많은 정보가 뇌로 들어와 미칠 지경이었다. 뭐라는 거야 빠가야로새끼야? 간단하고 무례한 문장이 목젖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그래도 역시 목숨 아까운 줄 아는 마코토는 다행히 입을 꽉 다무는 것에 성공했다. 그래도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까지 어찌 잡을 순 없었다.
“………”
“농담이야 맛쨩. 나도 도박꾼 사내새끼랑 결혼하고 싶진 않아.”
마코토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오늘은 참 제 인생의 오점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에게 감사한 날이었다. 내가 도박꾼 사내새끼여서 정말 다행이야. 동해는 그런 마코토를 향해 여전히 빙글빙글 웃어주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결혼해야 한다는 건 진짜야. 그러니까 네가 중매 좀 서 줄래. 그동안 애들이 소개해줬던 여자랑은 다 실패해서, 나 그러니까— 그… 성실이 일본어로 뭐냐? 아, 여튼. 괜찮은 인간인 척 결혼해야 하거든.”
아까에 비하면 감사할 수준인 제안이었다. 주변 똘마니들이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마코토는 그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해도 화답하듯 예쁘게 웃어줬다.
“그러니까, 직업이 어떻게 되신다고요?”
“그냥 도쿄에서 소소하게 똘… (툭.) …따까, (툭.) ……하, 애들 데리고?”
마코토가 식은땀 줄줄 흘리며 동해의 팔꿈치를 툭툭 칠 동안 겨우 두 테이블 떨어진 자리에 떼거지로 모여앉은 똘마니들은 이쪽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어떤 놈은 스케치북에다 형님 완벽하십니다-를 삐뚤빼뚤한 한국어로 써놓고 진심으로 뿌듯한 듯이 눈물을 훔치는 기행까지 보이고, 부모 역할로 데려온 꼬치집 주인 부부는 두려움에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지랄.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속으로 욕을 씹어 되뇌이고 있는 마코토는 제 야쿠자 친구가 망쳐놓은 중매를 수습하기 위해 홀로 기를 쓰고 노력 중이었다.
“하하, 이 녀석 부하 직원들이랑 같이 도쿄에서 자선 사업을 합니다. 제 친구 좋은 놈이에요.”
“아아… 뭐 험한 일 하시는 건 아니죠?”
마코토가 대답하기도 전에 동해가 해맑게 가로챘다. 전 전혀 안 하고 애들이 하죠. 결국 그날 만남도 쫑이었다. 상대는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고개를 조아리며 떠났고, 동해와 똘마니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갸웃거렸다. 마코토는 테이블에 대가리를 박고 일어서지 않았다. 차라리 그때 시멘트에 덮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는 안된다. 마코토는 동해를 위한 상견례 프리패스 교육을 시작했다. 사실 멀쩡하게 입고 입만 다물고 있으면 이미 상견례 프리패스상이긴 했다. 웃는 낯으로 야쿠자 오야붕들이 쓰는 단어만 골라 쓴단 점이 문제였다. 마코토라고 결혼을 해본 것도, 연애를 해본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동해를 위해(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위해) 엉성한 대본을 썼다. 모의 상견례 대본이라며 싹싹 외우라 했다. 동해는 처음에야 좀 인상을 썼지만 군말 없이 외웠다. 그래서 다음 상견례는 어찌 끝까지 잘 풀리는가 싶었다.
"직업이 어떻게 되신다 했죠?"
"애들이랑 자선 사업합니다."
"생각보다 나이가 좀 어리시네요."
"…불만이신가요? (툭.) …좋으시죠?"
"아니, 저희 딸이 나이가 좀 있어서…"
"상관 없고. 결혼은 언제쯤 될까요? 난 빠를수록 좋은데."
오늘도 아버지 역할로 온 꼬치집 아재가 급하게 수습했다. 저희 아들이 성격이 급하지요, 따님이 정말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아하하하... 웃는 타이밍인가? 일반적인 상견례 예의가 뭔진 몰라도 동해도 따라 웃었다. 상대 측 부모는 아무래도 좀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딸래미 아무리 골칫덩이라 한들 아무 놈에게나 시집 보내고 싶은 것은 아닐 터. 망설이는 중년 부부를 빤히 바라보던 동해는 확신을 주기 위해 어젯밤 키무라에게 배운 필살기를 썼다.
형님, 그, 제 친구새끼가 말해준 박력 있는 고백법인데 말입니다. 우선 테이블 한 번 쾅 치고.
테이블 한 번 쾅 치고. 상대 여자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고 중년 부부 또한 딸을 감싸며 기절할 듯 비명을 질렀다. 마코토 또한 쫄아서 납작 엎드렸다. 말릴 생각은 무슨, 이 미친 새끼 드디어 이빨을 드러내는건가 하며 질금질금 눈치를 살피기만 했다.
테이블 한 번 쾅 치고, 이래 막 딱 어깨도 털어주고. 너 내꺼하자. 딱 한마디 날려주면 뻑 간다 아닙니까.
딱 어깨도 털어주고. 위협적인 어깨 털기와 함께 옷이 흘러내린 통에 목의 칼빵 자국이 드러났다. 상대 가족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졌으나, 동해는 배운 대로 진행했다. 눈물 나게 안타까운 모범생 형님이셨다.
"…너 내꺼하자. ……이제 따님이랑 결혼할 수 있습니까?"
"저, 딸 데리고 생각 좀 해볼게요. 나중에, 나중에 연락 드릴게요."
도망치듯 식당을 빠져나가는 상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동해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면서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일 그르친 건 동해였으나 왜인지 마코토는 본인 자리가 가시방석인 것처럼 느껴져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아무 말도 못했다. 화가 난 상황에서도 가족에게만큼은 다정하고자 애쓰는 동해의 목소리가 쇳덩이처럼 마코토의 귀에 내려앉았다.
마코토, 됐어. 나가자.
동해는 뒷좌석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껌을 씹고 있을 뿐이었다. 식당에서 나온 후 욕을 하지도 않았고, 화풀이를 하지도 않았다. 그냥 대뜸 생각 좀 하고 싶다며, 똘마니들도 운전할 놈과 마코토만 남기고는 다 쫓아낸 뒤 뜬금없는 골목에 차를 세운 채로 껌만 짝짝 씹을 뿐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긴 했으나 차 내 인물과 눈이 마주치면 얌전히 지나갔다.
동해는 시커먼 눈깔로 창밖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마코토는 그 옆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까득까득 짓씹었다. 평소였다면 시원하게 느껴졌을 바람마저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쭉, 이곳에는 그 어떤 폭력적 행위도 없었으나, 동해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이 근방 모든 공기가 숨이 막혔다. 이쯤 되니 마코토는 차라리 자신이 동해와 냅다 결혼해버린 뒤 이 일을 치우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는데, 동해는 도박꾼 사내 새끼와 결혼하기 싫다 했으니 그럴 수 없었다. 죽도록 막막했다. 아니 이 새끼는 저 얼굴로 그 긴 세월 동안 정상적 연애 한 번 안 해본 거냐고? 세상 어떤 인간이 야쿠자 오야(그것도 또라이)와 하루만에 결혼을 오케이하겠는가. 막다른 길에 다다른 마코토는 이제 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으로 마지막 하나 남은 전화번호를 빤히 들여다봤다. [초절정레어 미미쨩]. 본명도 모르고, 동해가 원하는 배우자상과는 좀 거리가 먼 느낌이 강하긴 했지만 마코토에게 남은 패는 이것뿐이었다. 마코토가 마음을 굳게 먹고 동해를 부르려던 그 순간. 마코토의 목소리가 튀어나오기도 전에 불청객의 찢어지는 고함이 골목을 쩌렁쩌렁 울렸다. 똘마니가 가로막고 조질 새도 없었다. 어디서 본드라도 빨고 온 행색의 양아치들은 동해의 시커먼 눈깔 앞에 겁도 없는 주둥이를 들이밀고 본드 냄새 나는 욕설을 퍼부어댔다. 동해가 씹고 있던 껌의 딸기 향에 불쾌한 본드 냄새가 섞여들었다.
“차를 왜 여기다 대 놔 이 씨팔, 야 미친새끼야. 꼴값은 니 안방 가서 떨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아스팔트에서 지랄이야. 니가 야쿠자냐? 야쿠자냐 너? 기생오래비처럼 생긴 게… 악!!!”
창밖으로 뻗친 손은 그대로 양아치 하나의 코를 쥐어 잡아 비틀었다. 저기, 선생님, 예의는 집에 두고 다니시나요? 상황에 맞지 않게 예의 바른 어투의 일본어가 조곤조곤하게 골목 바닥에 가라앉았다.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가 말로에 가깝게 된 양아치의 코는 이미 반쯤 꺾여 코피가 질질 흐르고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은 있어도 말리는 사람은 없었고, 신고하는 사람도 없었다. 다른 놈 하나는 이미 어디로 도망친 건지 코빼기도 안 보였다. 간혹 휴대폰을 꺼내 드는 사람이 있었으나 동해 측 덩치 똘마니와 눈이 마주치고 나면 이내 허겁지겁 지나가기 바빴다.
도쿄 일대에서 동해를 이르는 말은 k-또라이였다. 좀 더 현지 느낌이 나게 말하자면, k-쿄우진. 예쁘장하고 얌전하다가 갑자기 휙 도는 게 미친놈같다는 이유에서 그런 별명이 붙은 것도 있었지만, 그는 누구 하나를 직접 담글 때마다 애국가를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우궁화, 삼, 천, 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누구보다 신성한 얼굴로, 환희에 들어찬 목소리로, 동태눈깔을 뜨고 상대를 내려다보면서. 이동해가 도쿄에서 단순 또라이가 아닌 k-또라이로 불리게 된 이유였다.
오늘도 늘 그랬듯 애국가를 흥얼거리며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양아치를 빤히 바라보던 동해는 제 손까지 피가 번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온 듯 욕을 씹으며 비틀린 코를 놔 줬다. 아 더러워 씹… 한국어로 튀어나온 말이었으나 똘마니는 용케 알아듣고 당장 튀어가 허겁지겁 차문을 열고 제 겉옷으로 형님 손을 닦아드렸다. 자신이 형님을 경호하지 못했다는 것에 큰 두려움을 느끼는 건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兄貴本当にごめんなさい私が早く動かなかったのでお兄貴の耳を汚してお兄貴の手も汚して私は本当に殺すやつ—"
"토우쨩."
"예, 예?"
"하나도 못 알아들어처먹겠으니 천천히 말해줄래."
"아, 예! 죄송합니다 형님…"
귀찮게 구는 토우쨩을 옆으로 대충 밀쳐내고 차에서 내린 동해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해보였다. 머리 위로 어지럽게 얽힌 전깃줄마저 아니꼬울 지경이었다. 답답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 번 크게 심호흡한 동해는 아까의 그 양아치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양아치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피가 질질 흐르는 코를 감싸쥐고 주저앉아 끅끅 울고 있었다. 사람 코는 좀 비틀어부러뜨려도 다정하고 예쁜 야쿠자 오야 이동해는 그에게 가까이 가서 눈높이를 맞춰 쭈그려앉는다.
"저기, 오빠야."
"힉, 잘못,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괜찮아~ 니 친구는 어디 갔어?"
"네? 저는, 저는 잘 모르는, 헉, 뒤에…."
형님! 토우쨩의 비명같은 외침이 동해의 귀에 채 닿기도 전에 두꺼운 야구 배트가 바람을 가르며 동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니, 떨어질 뻔했다가 실패했다. 야구 배트를 휘두르던 양아치보다 어떤 행인의 개입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뭐하시는거예요 지금!!!!!!!!!!"
숨을 헐떡이며 제가 넘어뜨린 양아치를 향해 빽 소리를 지르는 행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언어는 놀랍게도 한국어였다. 내내 시커멓던 동해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한편 양아치는 꽤 벙찐 모양새였다. 자신을 냅다 밀친 행인은 야쿠자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양아치쯤 되어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뭐… 그냥 흔한 회사원. 이런 폭력 상황에 엮일 인물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소리다. 생각이 끝나자 확 열이 오른 양아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물론 반격할 기회는 없었다. 동해의 충실한 개(인데 조금 느린) 토우쨩이 양아치의 대가리를 후려치고서 으슥한 골목 구석으로 질질 끌고 갔기 때문이다.
경찰에게 신고하려던 행인은 토우쨩에게 질질 끌려가는 양아치를 보고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에, 저기, 신고…해야 하는데…
"저기, 한국 출신이에요?"
행인의 휴대폰을 제 손으로 살짝 덮어주며 말을 건 동해가 배시시 웃었다. 살짝 스친 행인의 손이 부드러웠다. 내내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던 행인의 얼굴이 순간 확 밝아졌다. 어, 네! 한국어하시네요? 동해는 제 목의 칼빵 자국이 보이지 않게 자켓을 고쳐 입으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해한 웃음을 지었다. 티 안 나게 한쪽 발로 뒤에 여태 주저앉아있는 양아치를 툭 걷어차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배경 썩히지 말고 꺼지란 뜻이었다.
"저도 한국 출신이거든요,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니, 무섭긴 했는데… 저 사람이 그쪽을 때리려 하길래… 맞으면, 죽을 것 같더라고요… 게다가 그쪽은 저기 저 다친 분 도와주고 계신 것 같았는데, 어? 어디 가셨지?"
"그러게요. 언제 가셨지?"
행인은 동해가 야쿠자인 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동해가 주저앉아있던 이의 코를 부러뜨린 인물인 것도, 대규모 폭력 조직의 오야붕인 것도. 그냥 길거리에서 빠따 맞고 뒤질 뻔한 예쁘장한 남자쯤으로 보는 게 확실했다. 동해는 왜인지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뻔뻔한 예쁜 얼굴이 골목을 두리번대는 행인의 시야를 가렸다.
저기, 이렇게 구해주신 것도 감사한데 제가 다음에 밥 한 번 사고 싶어서요. 번호 좀 알려주실래요?
수많은 여자들과의 선자리를 거쳐간 이동해가 길거리에서 남자를 만난 날.
마코토에게도 자유가 찾아왔다.
"저, 그… 야쿠자, 셨던 건가요?"
"아뇨. 자선 사업입니다. 도쿄에서 하는."
"아하…"
본명 이혁재. 직업 회사원. 일본에 온 이유, 출장. 야쿠자와 만날 계획, 당연히 없었음. 야쿠자와 동성 결혼할 계획? 더더욱 없었음. 그러나 이혁재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미 나는… 엿된 거였구나. 이 남자를 구해준 그 순간부터.
"결혼이요…?"
"네. 그쪽이 맘에 듭니다. 비용 제가 다 부담하고, 혼수 그런 거 필요 없이 집도 우리 집에서 살 거고, 앞으로 생활 비용도 전부 제가 부담합니다."
"아 그러시구나…"
식은땀이 질질 났다. 남자고 여자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다짜고짜 타국에서 만난 모국 출신 야쿠자와 결혼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야쿠자인 줄 알았으면 이 자리에 안 나왔을 거였다. 그래, 무엇보다 너무 무서웠다. 며칠 전 길에서 봤을 땐 분명히 그냥 착한 예쁜 사람인 것만 같았는데, 오늘 다시 보니 시커먼 아우라가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청혼을 거절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좋다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싫다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혁재는 괜히 앞에 놓인 물컵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런 혁재를 참을성 있게 바라봐주던 동해가 테이블에 팔을 고이고는 꽃받침을 하며 태평스레 물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들어요? 나 야쿠자 아니라니까? 등록까지 된 사업체예요."
"하하…"
"아니면, 게이 새끼 소리 들을까 봐?"
"아, 아뇨, 저 그런 건 신경 안 씁니다…"
"쓰시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결혼식에서 내가 웨딩드레스 입으면?"
식까지 올리냐?! 혁재가 더 벙찐 표정으로 고개를 든 순간 동해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더 디밀었다. 이제 조금 구미가 당겨? 뭔 염병할 말을 나불대는진 몰라도 예쁘긴 확실히 예뻤다. 혁재는 순간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도 이딴 생각을 하는구나… 멍해진 혁재 앞에서 동해는 저와 결혼하면 뭐가 좋은지에 대한 이유를 간결하게 두 개 내놨다.
첫번째,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똘, 아니 부하직원들이 있다.
두번째, 난 돈이 많고 얼굴이 봐줄 만하다.
돈에 찌든 직장인으로서 돈이 많다는 그 말이 왜 이렇게 달콤하게 들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돈이 많아서 좋은 건지 아니면 그냥 정말 얼굴에 홀려버리게 된 건지. 혁재는 겨우 두 개 듣고 자꾸 허락해버리려고 달싹대는 제 입을 탁 치고 겨우 정신 차린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저 조만간 한국에 돌아가서요."
"같이 가죠 뭐."
"네? 사업하신다면서요."
"요즘 전화 잘 되어 있잖아요. 애들 시키죠 뭐. 저도 할머니 보러 한국 가야 해요."
"할머님요?"
동해가 한쪽 눈썹을 까딱이더니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어릴 때 키워주셨던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곧 돌아가신댔거든요, 근데 죽기 전 소원이 나 결혼하는 거라 해서. 그쪽은 저랑 그냥 대충 구색만 맞춰주면 돼요. 어차피 남자 둘이는 서류에도 못 올리고. 생각보다 너무도 다정한 이유였다. 다만 그 희생양이 자신이란 점이 억울할 뿐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아마도 아내를 데려오길 원하셨던 것 같은데.
"괜찮을 거예요. 그쪽 손이 예쁘잖아요. 여자 손 같고."
"예?"
"연애 안 하신 지도 꽤 되신 것 같던데. 그냥 저랑 결혼하는 게 좋지 않아요? 용건 끝나면 깔끔하게 헤어져 드릴게."
그건 언제 알아봤고, 애초에 그게 무슨 상관이며, 게다가 내 손은 얇을 뿐이지 꽤 핏줄도 나오고 남자 손인데— 혁재의 뇌는 이런저런 말들이 얽혀 어지러웠으나 입으로는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동해가 슬슬 참을성에 한계가 왔다는 듯 미간을 좁혔기 때문이다.
그니까 혁재 씨. 나 이렇게 오래 설득한 거 처음이거든. 결혼할 거야 말 거야?
혁재는 이 모든 상황이 꿈같았다. 출장 왔다가 냅다 처음 보는 남자 야쿠자와 썸(인지 쌈인지)을 타게 되어 며칠만에 계약 결혼하는 걸로 오케이하고 호화로운 집에서 같이 살다가 한국 돌아가는 비행기도 팔자에 없던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멍하니 자신의 남편… 되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게 된 이 상황이. 갑자기 상황을 받아들이고 나니 멘붕이 왔다. 이런 미친! 가족들한텐 뭐라고 말하지?! 동료들한테는?! 친구들한테는?! 이게 말이 되나?! 혁재는 원래 이렇게까지 즉흥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까지 무계획 한국 드라마마냥 흘러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사랑을 하면 사람이 미친다던데 지금 딱 그 꼴이었다. 게다가 그 무계획으로 이루어진 사랑에 꽤 중독되는 중이기까지 한 게 우스웠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동해를 보면서 무섭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 지금 키스하면 깰까, 등의 생각 같은 걸 하게 되는 걸 보면, 난 정말로.
혁재는 또 한 번 확신한다. 한국 드라마 전개 욕할 때가 아니다. 제일 미친 건 나야.
결혼 승낙 후 동해가 혁재에게 쏟은 정성들은 솔직히, 좀, 달콤했다. 처음엔 무서워서 동해를 피해 다녔다. 그도 그럴 게 무려 야쿠자였으니까. 눈도 안 마주치고, 밥도 제대로 안 먹었다. 일부러 집에도 늦게 들어오고 그랬다. 근데 한 번 애들 끌고 회사 앞에 와서 목 우득우득 꺾고 있는 거 보고 다음 날부턴 정시에 퇴근했다. 동해는 할 일이라곤 애들 묻으러 다니거나, 가끔 불려놓은 사업 상황 좀 보고, 회계사에게 상황 보고받고, 귀찮은 건 똘마니에게 맡기고 그러는 게 전부인지라 혁재에게 온 정성을 쏟았다. 혁재 올 시간 맞춰 저녁도 차려주고(한 번 동해가 저녁 준비하다 손을 다치는 바람에 혁재가 한동안 똘마니들에게 찢어지는 시선을 받아야 했으나), 목욕물도 받아주고, 오늘 잘 보냈냐 물어봐 주고. 이상적인 배우자였다. 야쿠자인 거 빼면.
그러면서도 혁재에게 손을 대지는 않았다. 절대. 그러다 보니 함께 지내는 내내 혁재는 결혼했다-의 기분보단, 솔직히 그냥 1등급 케어를 받게 된 기분이 들었다. 한 번은 그래도 도리를 지키고자 해서, 혁재가 용기를 내 자고 있던 동해의 뺨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는데 그대로 옆구리를 차여 날아간 적도 있었다. 그날, 저쪽으로 날아가서 끙끙거리고 있는 혁재에게 느릿느릿 다가온 동해는 혁재의 턱을 붙잡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달 나는 건 알겠는데 자기야, 내가 허락하기 전까진 안 돼."
미친. 뭔 안달. 그날은 억울한 마음에 동해를 팍 쳐내긴 했으나, 사실 안달 나고 있는 쪽은 의외로 혁재가 맞을지도 몰랐다. 동해는 멋있고, 예쁘게 생긴 데다가 몸도 좋았다. 가슴 크고 허벅지 꽉 찼고. 동성이든 이성이든 그의 애인이 되어 자주 그 모양을 살피다 보면 한 번쯤 궁금해질 법한 외관이었다. 야쿠자 오야씩이나 되는데 몸에 이레즈미도 없어서, 혁재가 생각하던 것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생각하던 것보다 좀 더 다정하고 착한? 호감이 쌓이는? 그런 느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해는 늘 혁재에게 호의만 베풀 뿐 쌍방 스킨십을 하려 들진 않았다. 혁재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짜 그냥 이렇게 쟤 피 빨아먹고 살다가 쟤네 할머님 앞에 가서 할머님 제가 바로 새색시예요 해드리면 되는 건가?
하여간, 혁재는 저도 모르는 사이 동해의 얼굴을, 어쩌면 동해를 — 꽤 좋아하게 되어버린 듯했다. 뽀뽀같은 건 할 생각 없어도 매번 동해가 잘 때마다 그 얼굴을 빤히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지금도, 살금살금 다가가서 졸고 있는 동해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진짜 예쁘게 생겼다. 야쿠자같은 거 한다고는 생각도 안 들 만큼. 속눈썹도 길고, 코도 오똑하고, 입술도 얄쌍하게 예쁘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참이나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데, 순간 동해의 눈이 번쩍 뜨였다.
"…"
"…어, 깼네."
"…혁아."
머쓱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는 혁재의 허리를 붙잡아 당겨 안은 동해가 그 등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웅얼댔다. 사랑해… 목소리가 잠기긴 했어도 장난기가 가득했다. 등을 징징 울리는 목소리에 이혁재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아 갑자기 얘 또 남편처럼 굴고 난리야.
"놔. 잘 거야."
"내 옆에서 자."
"그럴 거면 뭐하러 두 장 끊냐."
"…너 얼굴 보고 싶은데."
"그럼 다음엔 이코노미 타던가."
"…"
그러고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래도 자꾸 눈앞에 동해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것 같아서 크게 도리질 치고 아무 잡지나 꺼내 읽었다. 예쁜 여자들이 많이 나오는 잡지였다. 어릴 때 같았으면 계속 감탄하면서 봤을 그런 잡지. 그러나 현재의 이혁재는 몇 페이지도 채 넘기다 말고 잡지를 덮어버렸다. 그러고는 손에 얼굴을 파묻는다. 이동해가 제일 예쁘다니 내가 진짜 제대로 돌았나 보다…
혁재는 한국 들어오자마자 할 게 많았다. 가족에게는 물론이고 직장 동료와 친구들에게 하하 저 갑자기 이사했답니다 뿅. 같이 사는 사람도 있어요 — 와 같은 연락을 돌려야 했고 출장 보고도 해야 했다. 외국 나가서 힘들진 않았냐는 상사의 물음에 그냥 하하 웃었다. 갑자기 야쿠자 남편을 데리고 오게 되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 어느 출장보다도 잘 지내긴 했다. 밥도 누가 해주고, 목욕물도 받아주고, 빨래도 해주고… 하지만 결국 말할 수 있는 건 없어서 모든 걸 생략하고 예 괜찮았습니다 라고만 했다. 직장에서는 혁재가 뭐 보너스를 받아 이사를 간 줄 알고 집들이를 하라며 난리였다. 혁재는 집에 있는 야쿠자 오야붕(그리고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똘마니들) 생각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보류했지만, 의외로 동해의 반응은 쿨했다.
"데려와."
"어, 진짜?"
"어. 뭐 음식 대접해야 하고 그런 거 아냐?"
"어, 어…"
"집사람이 밥해준다 그래."
혁재는 솔직히 이때 좀 설렜다. 이 맛에 결혼하는구나… 괜시리 뭉클해서 동해를 끌어안기까지 했다. 동해야 사랑해. …네가 이러니까 소름돋는다 혁아. 내로남불 스킨십맨인 동해는 조금 질색했지만.
그러나 며칠 뒤.
"이랏샤이마세!"
동료들과 함께 집에 들어온 혁재는 수많은 거대 덩치 행렬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만다.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집을 잘못 들어온 거 아니냐며 나가려는 사람도 있었다. 어, 이게, 이게 뭐지? 혁재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리던 그때, 부엌에서 앞치마를 입은 채로 등장한 사과머리의 동해가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어서들 오세요. 차린 건 없습니다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덩치들이 일사불란하게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ご希望の食べ物をおっしゃってください。お持ちします!
동해가 미간을 좁힌 채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기, 얘들… … 여러분. 한국어로 부탁드린다니까요. 움찔한 덩치들이 허겁지겁 서툰 한국어로 이리저리 말해댔다.
원하시는 고기, 말해! 갖다주지!
문신만 가리고 셰프인 척을 시켜놓은 부하들의 서툰 한국어 솜씨에 한숨을 푹 내쉰 동해가 미안하다는 듯 혁재에게 눈짓했다. 혁재는 여전히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네가 미안할 건 그 부분이 아니라서 괜찮아. 그냥 내가 집들이를 하면 안 됐는데. 내가 나빴다. 일단 벌어진 상황을 수습부터 해야 했으니, 혁재는 이 모든 게 계획되었던 일인 척 어색하게 웃었다. 저, 어서들 드세요… 이 친구가 뭘 많이 준비해줬네요… 현지인 셰프를 데려와줬네…
그래도 똘마니들이 형님 눈치를 보며 기를 쓰고 친절한 출장 뷔페인 척한 덕에 분위기는 많이 풀렸다. 처음엔 아빠 등 뒤에 숨어서 오들오들 떨었던 아이도 소파 위에 올라가서 학교 숙제를 했고, 돌아 나가려고 했던 김 대리도 눅진눅진 녹은 얼굴로 소주를 붓고 있었다. 동해는 여전히 앞치마를 입은 채로, 술자리에는 끼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혁재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어제 찾아본 한국의 집들이 영상에서 와이프가 앞치마를 입고 있는 걸 본 모양이었다. 혁재가 그냥 같이 놀으라고 끌어당겨도 싫은 웃음을 짓는 걸 보면, 아마 몇 시간 내내 그러고 있을 작정인 듯했다. 그래도 혁재는 덕분에 좀 가오가 살았다. 처음에야 좀 엿됐다 싶었지만, 지금은 다들 친구 능력이 대단한 것 같다고, 얼마나 좋은 친구인 거냐며 입 모아 칭찬하기 바빴다. 남편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괜히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처음엔 사실 무슨 조폭인 줄 알고 깜짝 놀랐지 뭐야.”
“하하하…”
“조폭이면 뭐 어때요? 김 부장님, 예전에 조폭도 이기셨다면서요.”
“그래, 내가 예전엔 이 주먹으로 조폭놈들을 다 발랐었어.”
동해는 동태눈깔을 한 채 김 부장 쪽을 흘긋 바라봤다. 같잖아서 웃음이 다 나네. 김 부장은 동해가 왜 웃는 줄도 모르고 더 우쭐해졌다. 혁재만 벌벌 떨었다. 제발 조폭 얘기 그만하자! 그만! 제발 그만하자! 정작 혁재가 벌벌 떨고 있는 이유의 장본인인 k-또라이 동해는 이 같잖은 대화를 듣고 있는 게 꽤 즐거워서 괜찮았다. 호랑이가 고양이 노는 판을 망쳐서야 쓰나.
“삼촌, 삼촌. 저 이거 좀 알려주시면 안 돼요?”
“응?”
한창 어른들 사이 허세의 장이 열리고 있던 중, 최 과장의 아들 태근이가 동해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혁재는 순간 저도 모르게 안 된다고 할 뻔했지만, 의외로 동해의 표정이 괜찮아 보여서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래, 동해도 상식이 있는 사람인데… 혁재의 불안한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해는 그러라는 듯 눈썹을 까딱이며 태근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줬다.
“삼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새가 뭐예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새? 독수리? 타조? 요란스러운 술자리 속에서도 귀는 계속 동해 쪽으로 열어둔 혁재가 불안하게 입 속 살을 씹었다. 그러다 순간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단어가 있어, 동해를 말리려고 뒤돌려던 순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새? 짭새지.”
요란스럽던 술자리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혁재만 돌아보지 않았다. 뒷목이 따가웠다.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자기 뭐 잘못한 거냐고 눈으로 묻는 동해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 김 부장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 저 친구도 왕년에 좀 놀았나 본데! 그제서야 혁재도 어색하게 웃으며 동해 쪽을 돌아봤다. 동해는 김 부장을 빤히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발 동해야. 동해 그만. 동해 안 돼. 동해 멈춰.
“아니이, 삼촌. 두 글자 아니고 다섯 글잔데…”
“다섯 글자?”
혁재는 거기서 그냥 벌떡 일어나서 동해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더한 답변이 나오기 전에 피곤하면 들어가서 자라 하려고. 그렇게 혁재가 동해의 옆까지 다가간 순간,
“아, 알았다. 눈 깜짝할 새.”
“우와! 삼촌 천재야!”
이럴 수가. 그 순간 방에 온기가 확 퍼지는 것만 같았다. 혁재는 충동적으로 또 동해를 끌어안을 뻔했지만 참았다. 그래, 이동해가 나한테 영향 안 끼치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 같은 실수를 두 번 할 리가…
와장창!
“이 미친 개빠가야로 새끼! 형님, 정말 죄송합니다! 너 이 새끼, 감히 형님의 물건을… 아.”
“…죽고 싶니?”
“죄송, 아니, 사, 사장님… 그릇, 에 또…”
언어는 달라도 그 의미가 어떤지는 톤으로 대충 전해진다. 일본어로 정신없이 다급하게 쏟아지는 사과와 묵직하게 던지는 한마디 전부 번역기 없이도 상황이 충분히 전해지는 톤이었다. 더군다나 그릇을 깬 녀석이 동해의 눈치를 살피며 서툰 한국어로 벌벌 기는 모습은 단순 출장 뷔페 나온 사람의 모습이라기엔 많은 무리가 있었다. 애초에 출장 뷔페에서 나오면 저렇게 집을 경호하듯이 서 있지도 않지만. 결국 분위기가 또 얼어붙었다. 잠깐 턱을 괴고 쭉 거실을 스캔한 동해는 이내 안 되겠다는 듯 마른세수를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늦었네요.”
“…그러게, 요…”
“들어가 보시겠어요? 배웅해드릴게요.”
그러더니 한 손으로 사과머리를 풀고 혁재를 지나쳐가며 속삭였다. 미안.
혁재는 동해가 애썼다는 걸 알기에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냥, 그냥… 내일 출근했을 때 회사에 자신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니, 사실 어떤 이상한 소문이 돌더라도 야쿠자와 이혁재가 결혼했다더라는 현실보단 덜하겠지만.
집들이 이후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났으나 생각보다 크게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다들 혁재를 보면 어색하게 웃으면서 지나가고, 괜히 살만 스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미안해한단 점을 제외하면. 사실 집들이 이후 회사에서 잘릴 줄 알았는데 왜인지 일이 더 편해진 것 같아서 오히려 만족했다. 하하, 살다 보면 조폭이랑 같이 산단 소문도 나고 그러는 거지 뭐! 혁재는 하루하루 적응하며 생각보다 괜찮은 하루를 보내고 있는 반면, 동해는 날이 갈수록 혁재에게 미안해했다. 아마 그 집들이 이후로 모든 게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똘마니들은 그날 이후 더 이상 동해를 아니키(형님)라고 부르지 않았다. 무조건 사장님이었다. 한국어도 강제로 배웠다. 오히려 혁재가 똘마니들에게 미안할 수준이었다.
“혁아, 나 때문에 회사에서 힘들어? 그럼 그냥 내가 그 회사 살까?”
“미쳤니?”
“난 그런 거 안 해 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른단 말이야.”
“그럼 그냥 가만히 있어 좀. 나 괜찮아.”
“…”
이럴 때 보면 그냥 풀 죽은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나름 k-또라이라는 명칭까지 달고 있는 일본 거대 야쿠자 오야붕이면서. 게다가 겨우 계약 결혼이면서 이렇게나 절절매고 있는 것을 보면 가끔씩 혁재는 괜시리 이 철부지에게 애틋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오늘부터 할머니 뵈러 간다며. 난 일 끝나고 갈게.”
“응, 애들 보낼게.”
“아니, 나 택시 탈 건데?”
“…”
“…알았어, 너네 애들 차 탄다, 타.”
“우리 애들이지.”
“야. 난 야쿠자 안 해.”
분명 계약 결혼이랍시고 해놓고, 동해는 용건이 끝난다 하더라도 혁재를 놔주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혁재가 출근하는 길에는 자신이 제일 아끼는 똘마니를 붙여 보냈고, 혁재가 마지막으로 대문을 나서기 전에 손을 흔들어주지 않으면 굉장히 서운해했다. 뭐, 나쁜 기분은 아닌지라 혁재도 그냥 즐겼다. 거기다 이혁재도 이동해와의 결혼 생활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이렇게, 무슨 일이 있지만 않다면. 이대로 평생 쭉 함께 살아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응, 맛쨩.”
[동해, 형, 형님?]
“맛쨩, 그냥 하던 대로 해.”
[응, 어, 그러니까…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그때 네가 조져놨던 양아치 녀석들 있잖아.]
“아, 응.”
[그 녀석들 중 하나가 어디 조직 오야붕 막내아들이었나 봐.]
“그래서?”
[그 조직에서 복수하겠다고 며칠 전 몇몇이 출국했다 하더라고. 내가 듣기로는 오늘 너한테서 가장 소중한 걸 뺏어가겠다고…]
“그으래, 가끔 벌레도 기어 다녀야 살지. 알려줘서 고마워 맛쨩. 잘 지내.”
[아, 그런데, 동해! 내가 이미 혁 -]
“근데 다음부턴 이런 거 들으면 좀 더 빨리 말해 마코토.”
“누구니?”
“어릴 적 친구.”
“목소리가 좋지 않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일본 남자애들 톤이 원래 그래요. 할머니 나 그런 애 아닌 거 알면서 그러신다.”
할머니 앞에서만큼은 이동해도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할머니랑 헤어진 뒤로도 일본에서 좋은 부모를 만나 잘 컸고, 일본의 아주 큰 기업에 들어가 높은 직급에서 일하고 있다고. 그리고 할머니 소원대로 최근에 신붓감도 전했다며. 아주 참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할머니의 손에 제 얼굴을 부비며 말했다. 눈이 어두운 할머니는 동해의 말과 촉감이 전부이신 분이라 동해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잘 되었다고 기특해하셨다.
“우리 동해 못 본 새에 더 잘생겨졌네, 신부는 얼마나 좋을고…”
“응, 엄청 좋아했어요. 내가 좋대.”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여기 제 곁에 있었다. 동해는 앞으로 삼 일 내내 여기 있을 예정이니 괜찮았다. 할머니댁에서 3일을 보내며 시간도 보내고, 재롱도 떨고, 할머니에게 바깥 이야기도 해주기로 이미 계획했었다. 바깥에는 이미 데려다 놓은 부하들이 집 주변을 돌면서 순찰하고 있었고, 설령 여기까지 들어온다고 해도 제가 죽여버리면 되었다. 그러니까 무서울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이 전화를 받고 이렇게 불안한 이유는 -
“그런데 아가.”
“네?”
“신부 될 사람은 언제 오니? 얼른 만나보고 싶은데.”
“신부는 이따가 일 끝나면…”
혁재.
동해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 부딪히는 소리에 덩달아 놀란 할머니의 손을 급하게 잡아주면서도 머리가 새하얘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할머니도 당황했다. 언제나 다정하고 느긋하던 손자가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것은 처음 느꼈기 때문이었다. 왜 그러냐는 할머니의 물음에도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동해는 초조하게 문과 할머니를 번갈아 바라봤다. 할머니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혁재와 결혼한 것도 다 할머니를 위해서였는데. 그렇다고 혁재를 데리러 가지 않기엔- 한참이나 입술을 깨물고 서 있던 동해가 결국 바깥에 서 있던 부하를 불러 옆에다 앉히고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말했다.
“할머니, 나 신부 좀 데려올게요. 금방 올게요, 신부 데리고.”
할머니는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이면서도 잘 다녀오라며 동해의 얼굴을 만져 주고 싶어 하셨지만, 동해는 할머니의 손에 입만 맞춰주고 나갔다. 할머니가 지금 제 얼굴을 만지면, 제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진 것을 눈치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혁재는 동해보다 먼저 마코토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동해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오늘 변을 당할 거라는. 느긋하게 라떼를 마시며 잠깐의 쉬는 시간을 즐기고 있던 혁재는 전화가 끊어지기 무섭게 거의 통보에 가까운 반차를 쓰고 회사에서 뛰쳐나왔다. 아직 끝날 시간이 아니었으니 회사 앞을 지키고 있는 똘마니들도 없었다. 이 시간에는 버스도 없었고, 하필이면 택시도 보이지 않았다. 초조하게 발을 구르던 혁재는 결국 동해의 할머니댁까지 뛰기로 했다. 방법이 없으면 만드는 게 혁재의 철칙이었다. 같은 시각의 동해가 직접 차를 끌고 이쪽으로 오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혁재는 동해에게 할머니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다. 동해가 어려서부터 뒷골목에 뒹굴었던 것도 할머니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서였고, 일본에 살면서도 이름을 국가에 맞게 갈지 않는 것도 할머니 생각 때문이었다. 지난 몇 개월 함께 살면서 느껴본 k-또라이 이동해는 보기보다 여리고, 정이 많고, 착한, 그런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무도 공감하지 못할 내용이었으나 하여간 이혁재에겐 그랬다. 자신이 동해에게 단단히 코가 꿰여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동해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새 순애보가 된 혁재는 텅 빈 거리를 미친 듯이 뛰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혁재는 반 탈진 상태로 동해의 할머니댁 앞에 도착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 잠깐이라도 숨을 쉬는 데에 집중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음에도 일단은 보이는 대로 가장 큰 짱돌을 주워 들었다. 손이 덜덜 떨려서 제대로 쥐어지지도 않았지만 나름의 무기였다. 그러나 이렇게 달려왔는데도 주택 앞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목소리를 내어 동해를 불러보고 싶었으나 너무 숨이 차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안도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혁재를 감싸왔다. 한 발짝 한 발짝 떼는 것도 힘겨워 문 앞까지 금세 갈 수도 없었다. 결국 대문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자리에 멈춰 선 혁재는 마른기침을 토해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목 안쪽에서 피비린내가 미친 듯이 올라왔다.
“이혁재.”
혁재는 순간 반사적으로 짱돌을 쥔 손을 들어 올리며 돌아봤다. 그러나 그 손은 내리꽂힐 틈도 없이 상대에게 붙잡혀 멈췄다. 눈앞에 있는 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이동해였다. 바보야, 어디 갔었어! 방금 혁재가 제 머리에 짱돌을 내려찍으려 한 건 아는지 모르는지 덥석 혁재를 끌어안았다. 몸이 맞닿자 서로의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혁재는 방금 뛰어서 그렇다 쳐도, 차를 타고 다녔을 동해의 심장도 미친 듯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혁재는 지금 너무 어지럽고 힘들어서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나 우선은 동해가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제일 소중한 사람은? 네 할머니는?
“동해, 너, 할머니…”
“바보야, 너 설마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뛰어온 거야?”
혁재가 미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짜… 결국 눈물을 터뜨린 동해가 혁재를 다시금 꽉 끌어안았다. 넌 무슨 야쿠자 대가리씩이나 되는 애가 우냐… 그 말이 혁재의 목까지 차올랐지만 숨이 모자라서 바깥까지 나오지는 못했다. 알고 보니 이미 상황은 종결된 후라고 했다. 혁재의 예상대로, 복수가 동해의 할머니를 향해 있었던 건 맞지만 그 힘이 대단했던 것은 아니었다. 힘도 못 쓰는 잔챙이 몇 마리가 와서 달려드는 것 정도였던지라, 혁재가 도착하기 수 분 전에 이미 동해의 덩치 똘마니들끼리 빠르게 해결했다는 뜻이다.
“야, 나는 너 없어져서 진짜 얼마나…”
“넌 할머니 곁에 있어 드려야지, 날 찾아오면 어떡해. 제일 소중한 사람한테 복수한다는데.”
“무서웠단 말이야!!!!!!”
너 없어지는 게 얼마나 무서운데. 나한텐 너도 너무 소중하단 말이야… 생떼처럼 울먹이는 동해의 목소리가 오묘하게 따뜻했다. 불쑥 다가온 따뜻함에 할 말 없이 머뭇대고 있는 혁재의 몸을 더 세게 끌어안은 동해는 기어이 몰아치는 고백을 쏟아냈다. 너랑 평생 살고 싶어, 너랑은 평생 살 수 있을 것 같아. 너한텐 목숨 걸어도 안 아까워. 사랑해. 나 너 사랑해 진짜로, 혁아. 이런 달콤한 말들을 못하는 바람에 상견례를 죄다 박살 냈던 k-또라이에게 듣기엔 너무 간지럽고 떨리는 말들이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혁재가 어쩔 줄 모르고 입술을 달싹였다. 뛰느라 터질 것 같았던 심장이 진정될 틈도 없이 다시 죽도록 뛰기 시작했다.
“혁아, 나 진짜 너 사랑해…”
“…야, 남사스러워, 좀 떨어져…”
“일 끝나면 헤어져 준다는 거 거짓말이야. 안 헤어질 거야.”
“알았으니까 좀… 나도 사랑해 멍청아.”
“너도 사랑한다고 해.”
“…”
“얼른.”
“……愛してる、トンへチャン~。”
“…다음엔 한국어로 해.”
그러고도 한참을 더 끌어안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봤으면 황당했을 장면이었다. 벌건 대낮에 시커먼 남자 둘이 끌어안고 울고불고 아이시떼루요니 뭐니…. 하지만 둘은 결혼한 사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서로가 그 정도로 소중했으니까. 혁재는 그 순간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품고, 지금 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으로 출장 갔다가 k-또라이로 유명한 야쿠자랑 결혼 약속하고 들어와 야쿠자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느니 마느니 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k-드라마 전개 방식의 결혼 생활이어도, 정말로, 꽤.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라고는 해도.
“…할머니, 애요?”
“응, 우리 동해 닮은 아가.”
“……”
곤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동해에게, 혁재는 미간을 콱 좁혀 보였다. 되겠냐? 그렇게 입을 벙긋거리긴 했지만 혁재도 여전히 할머니의 손을 놓지 않고 꽉 잡아드리고 있었다. 색시가 남자인 줄 모르는 할머니만 뿌듯하게 혁재 손을 몇 번이고 쓰다듬어주고 계셨고. 우리 색시는 손이 참 크네 홀홀홀… 우리 동해랑 애도 낳구 예쁘게 잘 살어.
동해와 혁재가 곤란하게 마주 봤다. 아마 새로운 막장 드라마가 또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사랑하는 k-또라이와의 k-드라마.